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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행 1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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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행 14:8-18)


기독교에서 지키는 절기들 중에서는 세상 불신자들도 함께 지키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불신자들도 함께 지키는 날은 성탄절 정도이지만, 미국에서는 부활절과 추수감사절까지 온 국민이 다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불신자들은 그런 날들을 그저 휴일로만 지키는 것이지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음미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성탄절이란 그저 일 년 중 '제일 즐겁게 노는 날'로만 여겨지고 있으며, 부활절 같은 날은 그저 일종의 봄맞이 축제처럼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불신자들도 제법 그 뜻을 음미하면서 지키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조상인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후 첫 추수에 대하여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서 맞이했던 절기이니만큼 그 후손들 역시 적어도 이날만큼은 '감사'라는 마음을 간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이 추수감사절에는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며 보내기 마련입니다. 
  
성탄절 때에는 오히려 가까운 친구끼리, 혹은 직장의 동료들끼리 파티를 하면서 지내더라도, 추수감사절만큼은 가족끼리의 절기로 미국인들에게 인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서로가 돌아가면서 그 해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 중에 가장 감사한 것 한 가지씩을 나누기도 하는데, 비록 신자는 아닐지라도 일종의 '감사 간증'을 하는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만 본다면 미국에서의 추수감사절은 신자나 불신자나 별 차이 없이 지키는 절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가 모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이 절기를 지키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 있어서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자나 불신자나 공히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반면에 오직 참된 기독신자만이 감사드릴 수 있는 제목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을 통하여 상고해 보면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이 '당연히' 감사드려야 할 제목과 '특별히' 감사드려야 할 제목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내리시는 '일반 은총'은 불신자들도 감사할 줄 압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을 하다가 "루스드라"라는 곳에 갔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전도를 하던 중에 바울이 어떤 앉은뱅이 한 명을 보고 즉석에서 그를 고쳐 주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바울의 전하는 말에 대해서는 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이적을 목격하게 되자 당장 온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 폭발적인 반응을 11절부터 13절에 기록하기를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라고 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행한 기적을 보고 그 지방 언어인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루스드라는 그곳 지방의 토박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통용되었던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자기네들끼리 말할 때에는 그들 고유의 언어인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려 하는 것을 처음에는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바나바를 가리켜 "쓰스"라고 하고 바울은 "허메"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쓰스'란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혹은 '주피터'라 불리는 신으로서 그 많은 신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되었습니다. 
'허메' 즉 '헤르메스'는 그 제우스 신의 아들인데 신들의 대변인 혹은 전령 노릇을 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나바를 보고 제우스 신이라고 한 것은, 바나바의 외모와 풍채가 바울보다는 더 위엄스럽고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두고 허메라고 한 것은, 두 사람들 중에서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은 주로 바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두 신들이 자기네 마을에 친히 방문했다고 여기고 당장 그 지방에 있던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을 불러 바울과 바나바 앞에서 제사지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늦게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4절에서 18절에 보면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가서 소리 질러 15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신들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마자 당장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그 무리들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은 오직 그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즉 외모뿐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증거했습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우상과 같이 실존하지 않는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진짜 하나님을 그들 앞에서 선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그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전파한 내용은 이전에 다른 곳,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전했던 복음과는 좀 색다르고 특이한 각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전도해 왔던 주 대상은 주로 헬라화된 유대인들이었고 전도의 장소도 주로 유대인들의 회당 등 유대인들이 모인 곳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 성경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그들에게 전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만을 선포하면 되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였으며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것이 바울 전도의 주요 메시지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전혀 딴판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온통 이방인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구약 성경이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도 못한 '생짜배기'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나 그 성취 등에 대해서 말해 보아도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로 하여금 유일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반 은총'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라는 말은, 그들이 다른 우상 신을 믿는 것을 허용해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될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있기 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일깨워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로서 내리는 비, 결실의 계절, 음식"들로서 이런 것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베풀어 주시는 "선한 일" 즉 '일반 은총'입니다. 
그런 일반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쁨으로 만족케" 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이야말로 유일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는 가장 '일반적인 계시'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루스드라 사람들, 즉 하나님의 '하'자도 모르는 그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이 가장 기초적이고도 누구라도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반 은총'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베풀어 주시는 이 온갖 '일반적인 은총'들은 오늘날 역시 불신자들까지도 나름대로 감사할 줄 아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육신을 위하여 주어진 음식, 옷, 집 등을 두고, 혹은 자기네 인생에 생긴 어떤 복스러운 일들을 두고 어떤 뚜렷한 대상도 없이 그저 막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당신의 살아 계심과 선하심을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에 필요한 것들이 자기에게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언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되게 만드시고, 그 다음에는 그 감사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시고,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는 자가 생기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존을 위해 자연계를 통해 공급되고 있는 이런 것들이 이처럼 좀 양식 있는 불신자들의 마음속에서도 절로 감사가 솟아 나오게 한다면, 신자 된 우리들이야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용할 양식, 행복한 가정, 학교나 직장, 좋은 친구들 - 우리는 이런 것들만 두고도 적어도 불신자들이 드리는 감사보다는 훨씬 더 크고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호흡할 수 있는 공기, 자고 있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뛰는 맥박 – 이런 평범하게 보이는 것들조차 사실상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임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는 그 감사가 결코 '평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라는 사람이 만약 무슨 특별한 축복이나 기적적인 도우심만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사실상 여느 불신자나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못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런 '일반적인 것'들 역시 결코 저절로 생기거나 나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구체적인 은총'이며 단 하루라도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생존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때를 따라 온 땅에 내려 주시고 분초마다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신 것 등 저와 여러분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지난 한 해 동안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신 온갖 '일반 은총'들에 대하여 '당연히 바쳐야 할 감사'를 절대로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오직 택자에게만 내려 주시는 '특별 은총'은 신자라면 더욱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일반 은총'은 불신자들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고 그래서 신자라면 더욱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만, 불신자들은 절대로 알 수 없고 오직 신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감사 제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특별 은총'입니다. 
앞의 본문 8절부터 10절의 말씀을 돌아가서 보면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고 기록했습니다. 

15절 이하에는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가지고 전도하는 내용이 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바울은 이미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루스드라에 도착하자마자 여느 때 하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본문에 루스드라의 어떤 앉은뱅이가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바울의 말하는 것"이란 틀림없이 '복음 전도'였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아무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이 루스드라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오직 복음의 핵심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의 형편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초기에는 이전에 으레 했던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중심으로 전도했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의 복음 전도를 듣고 그 루스드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사람이 바로 한 "앉은뱅이"였습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보면 그 앉은뱅이가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그냥 그 앉은뱅이를 고쳐 준 것이 아니라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먼저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앉은뱅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귀담아 듣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믿는 믿음까지 그 마음속에 이미 싹트고 있었음이 명백합니다. 
나중에야 얼마나 더 많은 결신자가 생겼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루스드라 전도의 초기 단계에는 오직 이 앉은뱅이 한 사람만 그 복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만 복음에 대하여 그 심령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의 그 유력한, 그 지혜로운, 그 돈 많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이 이름 없는 앉은뱅이 한 사람의 심령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십자가를 통하여 소망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령에 그런 믿음이 들어간 것이야말로 그가 앉은뱅이였다가 일어나 뛰게 된 것보다 사실은 훨씬 더 큰 기적이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중요하고도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의 마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앉은뱅이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만 베풀어 주신 그 특별한 은혜란 정말이지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감사 제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문자 그대로 딱 자기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결실기는 루스드라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었고, 음식이나 인생의 기쁨도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역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가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기게 된 것과 그로 인하여 병 고침까지 받은 것은 오직 그에게만 일어난, 하나님께서 오직 그에게만 주신 '특별 은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그 앉은뱅이가 그 사건 이후에 어떻게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만약 그가 이것을 두고 감사할 줄 몰랐다면 말도 되지 않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에게 들어간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가 진정 감사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에 대한 감사'야말로 다른 루스드라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었던, 오직 그 앉은뱅이 한 사람만 깨닫고 드릴 수 있던 감사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감사 제목은 예나 지금이나 바로 이것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수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한 구원'이라는 이 엄청난 특별 은총을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이 놀랍고도 귀중한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어떻게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두고도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도, 바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따라오게 되는 다른 기적적인 은총들 역시 셀 수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 우리가 성도와 교통하는 천국 권속이 된 것,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선한 일에 남은 인생을 헌신 충성하며 살게 된 것 - 이런 것들 모두가 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뒤따라 온 기적적인 은총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생 구원'과 '중생인으로서의 새 생활'이야말로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실로 '특별한 은총'임을 깨닫고 이를 인하여 항상 감사하며 가장 크고도 뜨겁게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만족케 하는' 온갖 좋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하여 비와 결실기를 주심으로써, 우리는 식탁 앞에서 만족하고 자녀를 보면서 행복에 잠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두고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여느 불신자들보다도 못한 몰염치한 인간, 아니 그저 눈앞에 주어진 것을 먹기만 하고 주인에게 감사할 줄은 전혀 모르는 짐승과 다름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가 지나가면서 매일의 일과가 반복될 때에도 그런 것들을 절대로 우연히, 자연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일분일초와 사사건건이 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 은총'의 구체적인 결과인 줄을 깨닫는 가운데 잊지 말고 항상 감사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큰 감사 제목을 결코 빠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누리는 일반 은총은 남보다 조금 못할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지만, 오직 우리 자신만이 누리고 있는 최고의 '특별 은총'은 결코 남보다 못할 때나 적을 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덕분에 원래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했던 나의 죄가 용서를 받고 영생 구원을 받게 된 것과 바로 그 믿음 안에서 누리게 된 중생인의 새 생활로 인한 기쁨과 만족은, 루스드라에서 단 한 명의 앉은뱅이에게만 주어졌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수의 신앙인들에게만 주어진 아주 특별한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만족케 하는 '일반 은총'을 두고서도 당연히 불신자보다 더욱 진실한 감사를 드리고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는 '특별 은총'을 생각할 때에는 더더욱 뜨겁고 풍성한 감사를 비단 오늘 추수감사주일뿐 아니라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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