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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아는 사람 (시 1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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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아는 사람 (시 116:12-14)


옛 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의 심성을 잘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원수는 없고 은혜만 있는 사람도 없고, 은혜만 있고 원수는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고 어려운 까닭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에 원수만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를 잊고 원수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하나도 바뀌지 않아도 만일 우리가 변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원수를 잊고 은혜만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면 세상도 좋아지고 우리의 마음도, 삶도 좋아질 겁니다.

은혜를 알면 우선 내가 행복해 집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이 행복함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똑 같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항상 기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면 은혜를 베푼 사람이 행복해 집니다. 말라위 그물리라를 다녀왔습니다. 저희 교회가 세운 열매나눔재단이 섬기고 있는 사역지입니다. 열매나눔재단은 저들의 자활과 자립을 위하여 지난 일 년 동안 약 8억 5천 만 원 정도를 지원하였습니다. 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물리라 현장을 돌아보면 너무 놀랐습니다. 상상이 안가게 발전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년엔 솔직히 인간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신앙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특징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노래와 춤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탁월함은 핏 속에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초등학교 학생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노래는 우리를 위하여 만든 노래였습니다. 그 가사 중에 하나가 우리를 너무 감동케 하고 행복케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더 이상 굶지 않는다.’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노래였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단순히 구제하려고 하기보다 어떻게 하든지 자립하고 자활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구제는 효과가 빠릅니다. 그러나 지속성이 약합니다. 자활과 자립은 효과가 좀 늦습니다. 그러나 지속성이 강합니다. 그런데 그물리라 마을에서의 저희 사역은 구제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그에 못지않게 효과가 빨리 나타났습니다. 몇 년만 더 투자하고 헌신하면 우리가 떠나도 저들은 굶지 않고 자기 아이들에게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고 교육을 시킬 수 있는 마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감사하게도 저들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는 더 이상 굶지 않는다.”라는 노래 가사 속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노랫 말 하나에 우리는 모든 보상을 다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노랫 말 속에 담겨있는 감사의 마음 하나 때문에 우리는 틀림없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신나게 저들을 지원할 것이고 투자할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알면 은혜의 상승효과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지 못하면 은혜의 급감효과가 일어날 겁니다. 은혜를 베푼 사람의 마음 속에 ‘다 소용없어’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심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고 그 때문에 감사로 제사를 드린자에게 하나님이 작심하시고 복에 복을 더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이 세상과 사람을 좋게 만듭니다. 은혜를 모름이 세상과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를 돌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 저도 있고 여러분들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을 행복하게 한 기막힌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아멘.

이 시편의 기자에게는 좋은 일만 있었을까요? 은혜만 있었을까요? 시편 16편을 잘 읽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을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라는 표현이 있고, 10절에 보면 “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고백하고 노래하는 이 시편 기자의 삶에도 우리 못지 않은 어려움과 역경과 고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삶이 고통스러웠으면 ‘스올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썼겠습니다. 스올은 음부와 지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혜만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사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저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이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법 가난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사치고는 무척 부유한 쪽에 속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하는 염려가 저에게서 없어진지 이미 오랩니다.

전에는 무엇을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었고, 무엇을 먹고 싶어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고, 무엇을 마시고 싶어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입고,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이 없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마음대로 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어리석어지고 교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디 가서 밥 세끼 못 먹을까?’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으시면 당장이라도 세끼는 고사하고 하루에 한 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기문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건성으로 하지 않습니다. 어제 점심에 아내와 함께 냉면을 먹었습니다. 냉면 한 그릇에 만 원을 받는 집에서였습니다. 보통 집보다는 조금 더 받는 그런 집에서 냉면을 먹으며 그런 집에서 제가 좋아하는 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저는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은퇴해도 이 정도는 언제나 먹고 싶을 때 먹으며 살 수 있겠지?’ 

늘 가난하게 살아 설렁탕 집에 써 붙이 대중음식점이라는 말을 이해 못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그릇에 만 원을 받는 냉면 집이 대중음식점으로 이해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이 저는 감사합니다.

일용한 양식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니 감사의 지경이 갑자기 넓어졌습니다. 감사의 지경이 넓어지니 덩달아 행복의 기경이 넓어졌습니다. 정말 범사가 감사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째, 좋은 만남을 주신 하나님이 감사했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이 새삼 감사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영화 ‘장군의 아들’의 주인공과 씽크로율이 거의 100%인 사람입니다. 저희 아버지의 삶을 영화로 만들었어도 ‘장군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6살에 평북 선천 아버지 마을의 일본 오야붕을 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향을 가진 아버지가 47에, 우리나이 48에 저를 낳으시고 학교 수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이 놀라셨습니다. 아버지의 성격과 자존심으로 보아 남의 밑에서 수위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 제게 해 주셨던 말씀 잊지 않습니다. “마흔 여덟에 너를 낳고 보니 똥 구루마라도 끌 수 있겠더라.”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저 때문에 고생을 마다 않으시고 키워주신 좋은 부모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이 오늘 문득 감사했습니다.

좋은 아내와 자식을 주신 하나님이 감사했습니다. 제 아내는 제게 너무 좋은 아내입니다. 제 자식은 제게 너무 좋은 자식들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냥 줄이렵니다. 제 행복과 감사의 가장 큰 부분은 제 아내와 제 자식입니다. 가정입니다. 손주 며느리들까지 제겐 다 큰 복입니다.

좋은 스승과 친구들을 주신 하나님이 감사했습니다. 저는 참 좋은 사람들 만나는 복을 유난히 많이 받았습니다. 임택진 목사님과 주선애 교수님과 같은 정말 좋은 스승을 만나는 복을 받았고, 어려부서부터 지금까지 정말 좋은 분들과 친구하는 복을 저는 받았습니다.

이제껏 목회를 해 오면서 정말 좋은 동역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일을 저지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은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것을 다 수습하고 정리하는 은사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제가 좋은 동역자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좋은 일이기하지만 대개 사고만 치고 수습은 못해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친 사고는 대개 다 잘 수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좋은 동역자들을 만나는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교회를 넷으로 분립한 것도 대형사고가 될 수 있는 일이었고, 예배당 지을 돈으로 재단으로 세워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들을 세운 것들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지금 제게는 평생의 성공과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맡아 수습해 주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좋은 삶의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좋았던 것이 믿음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우등상을 타본 적이 없었고, 소위 일류 명문이라는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게 학교가 주신 못하는 지혜를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의 저는 어제의 제가 꿈꾸던 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저는 어제의 제가 꿈도 꾸지 못했던 저입니다. 저는 그 감당 못할 복이 바로 그 지혜에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으로 별로 똑똑하지 못했으나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통하여 얻게 된 지혜로 말미암아 누구 못지 않게 형통한 삶을 얻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저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저는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구원의 하나님이 감사합니다.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모든 감사를 다 합친 것보다 뛰어난 감사는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감사함니다. 저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압니다. 정말로 압니다. 그런데 그 죄가 저에게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목사로서 하는 상투적인 말이 아닙니다. 정말 저는 그것을 압니다.

그 어떻게 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이 사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저의 저된 것은 그러므로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저는 없습니다. 

저는 시편 32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다윗은 시편 32편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저는 다윗의 마음을 압니다. 저도 그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 다른 복을 못 받았다고 하여도 이 복 하나만으로도 저는 평생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가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이 말씀을 통하여 이 시편의 기자가 스올의 고통이라고까지 표현한 고통과 불행을 격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구원의 복이었습니다.

남이 받은 이런 저런 복을 혹 나는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은 보편적인 복입니다. 이 구원이 복이 감사할 수 있으면 범사가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와 같이 말입니다. 스올이 고통이 우리를 감싸도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는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저도 남은 평생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며 살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때문에 또 누리게 될 구원의 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세상에서 천국을 살다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함께 가시지요?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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