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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다른 보혜사 (요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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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혜사 (요 14:15-2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6-20)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5-26)


또 다른 보혜사

오늘은 성령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육체적으로 떠나심으로써 제자들의 눈에는 임마누엘의 주님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심난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거듭 자신을 대신할 보혜사(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의 특별한 호칭은 보혜사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보혜사(保惠師)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성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최초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때에 새로 만든 신조어로 생각됩니다. 

지킬 보(保) 자에, 은혜 혜(惠) 자에, 스승 사(師) 자를 썼습니다. 지키고,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역할을 합성한 뜻입니다. 보혜사란 단어는 헬라어로 “paravklhto"”(파라클레토스)입니다. 그 뜻은 도와주기 위해 ‘곁으로 부른다’(para + kalevw : 파라 칼레오)는 뜻입니다. “paravklhto"”(파라클레토스)는 영문이나 한글 성경에 다양한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보호자(현대인), 변호자, advocate(JB,NEB), 협조자, helper(NASB,공동), 위로자, comforter(위클맆,AV), 상담자, counselor(NIV), 대언자(요일2:1) 등등. 해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여러 가지 번역 중에서 가장 적절한 의미는 ‘변호인’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성도들의 변호인이십니다. 성도들에게 오셔서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을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인생들의 변호인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세상 변호사처럼 대하면 안 됩니다. 세상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첫째로,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변호사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 속에만 찾아오십니다. 성령님의 변호를 받고 싶으시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셔야만 됩니다.  

둘째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변호하십니다. 세상 변호사는 의뢰받은 문제만 다룹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도와주십니다. 영혼의 문제나, 육신의 문제나, 재산 문제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죽고 사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의뢰 받은 일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도와주십니다.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보혜사’란 말은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성령님은 모든 인생 문제의 보호자요 변호자요 협조자요 위로자요 상담자요 대언자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인생 문제에 돕지 못하실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세상 변호인은 돈 받고 맡은 사건에 한해서만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 인생에 만나는 모든 일에 관해서 도움을 주십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곁에 계십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metav) 있게 하시리리...저는 너희와 함께(parav)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ejn) 계시겠음이라”(16-17)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교제하시고(metav, with), 우리 삶 속에 임재하시고(parav, from, with), 우리 인격 속에 내주하심(ejn, in)을 의미합니다.(롬8:26) 이렇게 성령님이 함께 사시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삶의 벽에 부딪치면 누군가 내편에 서서 도와주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진정한 도우미는 없습니다. 사람은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사람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운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31:1-3) 

사람 의지하지 마세요. 사람은 진정한 도움이 못됩니다. 우리 인생을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임하심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경로입니다.  성령이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임하실까요?  성령은 예수님의 요청으로 성부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성령을 엉뚱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19에 보면,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안수하면 귀신이 쫓겨 가고, 불치병자나 불구자가 일어나고, 방언을 하니까, 베드로 사도에게 돈을 바치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노발대발 하면서 이렇게 저주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19:20) 요즘도 성령을 돈으로 사고, 인간의 노력으로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단련하고 연습한다고 임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믿음의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 속에 성령은 오십니다.  
  
성령은 예수님 때문에 오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청하시고 보내셔서 예수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의 보혜사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원래부터 계시는 제1의 보혜사가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1서 2:1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여기서 ‘대언자’란 말은 헬라어로 ‘보혜사’와 같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은 사형 선고 받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는 제1의 변호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역할을 하십니다. 선한 목자요(10:11), 양의 문이요(10:8), 생명의 떡이요(6:48), 빛이요(8:12),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6) 때로는 근엄하고 자상한 아버지시요(14:18), 형님이시요(20:17),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우리의 친구십니다.(15:15) 

이러한 예수님이 잠시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셨을 때 제자들은 낙심했습니다. 누가 이러한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가? 주님은 이렇게 걱정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면서 제2의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요청하신 결과로 예수님과 똑 같은 역할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제2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성령을 구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만 성령님이 그 마음에 오십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 속에 강림하신 시기는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은 매우 의미 있는 절기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주님의 부활 승천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승천하신지 1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을 부활을 목격했던 500여 명의 무리들 중에 약120여명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시작한지 열흘째 되던 날 갑자기 공중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불이 혀같이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 불의 모양이 보이고 바람 소리가 들린 것은 신성을 지니신 성령이  임재하신 표식입니다. 과거 시내산에서 혹은 광야 시절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불과 구름 기둥, 혹은 천둥과 번개와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육안으로 느끼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날에 성령이 오신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본래 성령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각 사람 속에 임하여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날 때에 성령님은 인간들 속에서 떠나셨습니다. 홍수 심판에 앞서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그런데 그 아주 떠나셨던 성령께서 다시 인간 속에 영원히 거하고자 오셨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은 구약의 오순절입니다. 구약시대 오순절은 첫 열매 드린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대량 추수가 이루어지는 절기입니다. 성령이 오신 신약의 오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이 살아나신지 50일째 되는 날,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시는 성령이 임하셨으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성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성령은 예수 믿는 자 속에 임하십니다.  교회 다닌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교리를 안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믿음이 많든 적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인생을 맡기세요. 그러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성령 받기를 원하십니다. 가이사라에 주둔하던 로마군의 백부장 고넬료는 집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베드로의 설교들 듣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0:44)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행8:14-16)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9:5-6)  우리도 이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알고 그 분이 바로 내 인격 속에 살아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약속하셨고, 예수님이 구하셨고, 예수님 대신 아버지께서 보내신 보혜사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동거

이제까지 보혜사 성령과 오시는 경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성부 성자 성령과 성도가 함께 동거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앞서 빌립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님은 자신 속에 아버지가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일체적 관계입니다. 여기에 이제 성령님과의 관계, 나아가서 성도들과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6-20) 

이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보세요. 주님이 아버지께 구하셔서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성도들과 함께 있습니다.  장차 육체로 떠나셨던 주님도 다시 오셔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십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성도가 인격적인 동거 안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원한 동거!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성도들의 최종적인 삶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성령님이 성도들 안에 계심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의 역할이 뭡니까? 성령님은 주님을 대신한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적어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육체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에게 가장 큰 역할을 하실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본문은 성령님의 칭호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17) 성령님 칭호 앞에 “진리”(ajlhvqeia)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26절 말씀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언급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 

첫째는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게 하십니다. 바른 판단을 하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마귀와 싸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지혜를 주시고, 때로는 능력을 주십니다. 병을 고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게 하십니다. 마음에 결단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지요? 그러면 지금 성령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십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거룩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항상 삼위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우리의 최고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오라

이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영적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사탄의 세계 아니면 성령의 세계,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3의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싫든 좋든 국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을 영적인 국적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사탄의 나라!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나라에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굴복하지도 않고, 그 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세요.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거짓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죄가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탈출하여 성령의 통치 안으로 들어와야만 됩니다.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결코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의 보다는 불의를 좋아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따라가고, 일신상의 안락함을 따라갑니다. 

역사를 보세요. 독재자 한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나요? 그래도 여전히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들이 악한 지도자 아래 신음합니다. 근면 정직하면 돈 번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 안하고 수단부리지 않은 자가 재벌 된 적 있나요?  겸손하고 온유하면 대접받는다 하지만 온유 겸손한 사람이 정말 높은 자리 차지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다소나마 정의가 존재하고, 선이 존재하고, 사랑과 인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요?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모든 인간들을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인 말로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선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마5:45) 

또한 악한 인간들을 부단히 심판하시고 더 악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 사회에서 손을 떼신다면 당장 죄로 멸망합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탄의 세상에서 탈출했습니다. 비록 세상에 몸 담고 살지만 이제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오려면 세상 죄를 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 

먼지 묻은 유리창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죄로 가득한 마음에 성령님은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찬송가 255장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너희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죄의 빛 흉악하나 희게되리라. 주홍빛 같은 네 죄 주홍빛 같은 네죄 눈과 같이 희겠네. 눈과 같이 희겠네. 

2.악한 죄  벗으라고 주님 너를 부르네.  하나님 크신 사랑 한이 없어라. 악한 죄 벗으라고 악한 죄 벗으라고 주님 너를 부르네. 주님 너를 부르네. 3.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 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아니 하시네. 기억 아니 하시네.” 

386장에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세상에는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1)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줄 알며 고백하고 예수님의 속죄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각양 도우심 속에 살게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이 새 인생으로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을 받으셔서 소속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탈출하세요. 사탄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악한 영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죽음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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