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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분간하지 못하십니까? (눅 12: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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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간하지 못하십니까? (눅 12:54-59)

돌아오는 12월 19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지요? 우리나라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습니까? 지금은 혼전 속이라 누가 될지 쉽게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들 나름대로 셈은 하고 계실 것입니다. ‘누가 될 것이다, 누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말입니다. 

이제 갈수록 사람들이 모이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반드시 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분석을 통해서 스스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선거라는 것은 언제나 예측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측을 해 봅니다. 심지어 선거가 치러지기 1년 전부터 여론조사라는 것을 통해서 이번에는 누가 될 것인가를 예측하러 합니다. 이렇게 선거를 예측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요즘이야 뉴스를 통해서 매일 일기예보를 들을 수 있습니다. 굳이 일기예보 뉴스를 듣지 않아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지금 어느 지역의 날씨가 어떤지, 온도는 얼마인지, 내일 모레는 어떨지’ 하는 것들을 쉽게 검색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과학과 매체가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경험을 통해서 날씨를 예측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제 비가 오겠구먼 하고 예측하는데 그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오늘 날씨가 무척이나 덥겠구먼 그렇게 예측하는데 그것 역시 정확하게 맞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땅 서쪽에는 지중해라는 커다란 바다가 있습니다. 그쪽에서 발생한 구름은 지중해의 높은 습도를 머금은 비구름입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면 곧 큰 비가 내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들이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가뭄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섬기는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는지 모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누가 참 신이지 대결하게 됩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을 내려 제물을 태워버리신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보인 후에,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다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이제 곧 큰 비가 올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왕궁으로 가서 맘 편하게 먹고 마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제 바알의 우상이 깨어진 이 땅에 하나님께서 가뭄을 끝내고 큰 비를 주실 것이란 예언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엘리야의 말을 듣고 왕궁으로 돌아가자, 엘리야 선지자는 다시금 갈멜산 위로 올라갑니다. 비를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갈멜산으로 올라간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데, 굳이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거기서 기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갈멜산에 불을 내려 살아계신 참 신임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그런 기적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시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가뭄으로 고통당한 이 땅에 비를 내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참 신이심을 보여 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갈멜산은 지중해가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지중해에서 구름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중해에서 구름이 생겨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와야 비가 내립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사환에게 가끔씩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아라.’ 지중해 쪽을 바라보고 구름이 일어나는지 관찰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했는데도 지중해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이나 가서 본 후에야 지중해 쪽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그 사환을 아합 왕에게 보내어 이렇게 일러줍니다. ‘이제 곧 큰 비가 와 많은 비로 인해서 길이 끊길지 모르니 마차를 타고 서둘러서 빨리 왕궁으로 가시라.’고 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당시 사람들처럼 언제 비가 올지 잘 알았습니다.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야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게 됩니다. 비록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라 하더라도 그게 이스라엘 땅에는 큰 비를 내릴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그 구름을 가장 먼저 보았고, 큰 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올 것을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 남쪽은 사막지역입니다. 네게브라 불리는 이스라엘 사막뿐만 아니라, 그 아래쪽에는 거대한 아라비아 사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입니다. 그런 바람 가운데 때로는 ‘시로코’(sirocco)라고 불리는 무서운 바람도 있습니다. 흔히 성경에서 ‘동풍’이라고 표현되기도 한 이 시로코는 엄청난 더위를 몰고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쪽에서 바람이 불 때에는 그 날은 무척이나 더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기상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기상의 변화가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날씨가 어떨지 궁금해 하고, 날씨를 분별할 수 있는 어떤 징조가 보이면 그것을 통해서 그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준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분간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안다’는 뜻뿐만 아니라, ‘친숙한 사이가 된다, 이해한다, 해석한다, 기억한다’는 뜻을 다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본문의 말씀은 ‘천지의 기상변화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잘 해석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면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시대의 징조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도 둔하냐?’ 그런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이 기상의 변화에 민감한 이유는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가 올 줄 알면서 외출할 때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그 비를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올 것 같으면 우산을 챙겨서 나갑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기상상황에 더욱 민감합니다. 비가 올 줄 알면서 이른 새벽에 나가서 논과 밭에 물대기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논에 물을 가득 받아놓았다면 받아 논 물을 미리 빼야합니다. 그래야 비가 올 때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기상변화에 민감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고, 잘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간해야 할 것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 시대’라고 말씀합니다. 기상의 변화에 민감하여 기상상황을 잘 알고 대처하면서도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기상상황은 분간하지는 못할지라도 반드시 분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면서 기상상황만을 잘 분간하면 그것은 외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비가 올 것인가, 날씨가 무더울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우리가 분간해야 할 ‘이 시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면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맙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누가복음 12:35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 같이 되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결혼식을 밤에 합니다. 결혼식이 열리게 되면 신랑이 먼저 신부의 집으로 신부를 데리러갑니다.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 비유에 나온 것처럼,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면 신부의 친구들이 멀리까지 나가서 신랑을 맞아 신부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신부 집에 도착한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성대하게 결혼 잔치를 엽니다. 

누가복음 12:36절의 말씀은 바로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데리러 떠나간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랑 집 하인들은 주인이 신부를 데리고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신부를 데리러간 신랑이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 집 하인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인이 돌아오면 주인을 맞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인을 기다리다가 잘 맞아준 하인이 있다면 그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고 가신 우리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 더 묻겠습니다. 다시 오실 그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면서도, 그 때를 모른다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시대의 징조들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비가 올 것인지 날씨가 더울 것인지 민감하게 분석하고 알아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신앙인으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는 것은 게으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내게 주신 시간, 내게 주신 재능, 내게 주신 물질,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심판의 주님 앞에서 계수해야 할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를 위해서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는 주인인 신랑을 기다리는 하인에 대한 비유를 41절 이하에서 주님께서 해석해 주십니다.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칭찬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지 맘대로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47-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면서도 심판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엄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알면서도 게을러서, 또는 지금 내 사는 재미에 빠져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은 더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면 준비하십시다. 게으르지 말고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사십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잘 했다.’ 칭찬하시게끔 충성하십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주님이 심판하러 오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삽니다. 
  
오늘 비가 올 것인가 아니면 무더울 것인가 하는 것을 분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가 올 징조가 보이는데도 우산준비를 하지 못해서 흠뻑 비를 맞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해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고 벌을 받는 것입니다. 시로코와 같이 무더운 바람이 불어올 때 준비하지 않아 무더위에 고생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빠져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천지의 기상상태를 분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분간하는 것입니다. 본문 58절 이하에서 이런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너를 고발하는 사람과 함께 재판정에 갈 때에 재판정에 도착하기 전에 빨리 서로 화해해야 한다. 화해하지 않으면 감옥에 갇혀 고생하게 되고, 네가 갚아야 할 것 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빨리 깨닫고, 빨리 화해해야 함을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종종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면서도 내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보지 못하고 상대가 잘못한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화해하려 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서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꺾어 놓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불과 몇 시간 후에 우리에게 닥칠 일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고발하려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재판정에 들어가는 사람이 곧 자신에게 형벌이 내려져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될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얼마 후에 자신에게 벌어질 일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때로 사람들에게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처럼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고서도 곧 큰 비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살갗을 스치는 미세한 바람을 통해서 곧 시로코가 불어올지 모르니 대비하라고 알려준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칭찬받을 만큼 잘 가르쳐주면서도 정작 자신 앞에 닥친 일에 제대로 대처할 줄 모른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13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그는 농사를 지었는데 풍년을 맞아 많은 추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창고로는 거둬들인 곡식을 다 저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큰 곡간을 지었고, 거기에다가 추수한 곡식을 가득 쌓아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만족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러 해 먹을 수 있는 곡식을 가득 쌓아놓았으니, 평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창고에 여러 해 먹을 곡식을 가득 쌓아놓았다 한들 오늘 밤 그 영혼을 취하여 가신다면, 창고에 가득히 쌓인 그 많은 곡식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가 풍년으로 많은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던 것은 기상상황을 잘 분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 비가 올지, 언지 씨를 뿌려야 할지, 언제 추수를 해야 할지 그는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 맞게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하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렇게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곡식 창고를 크게 늘려야 할 정도로 기상상황을 잘 분간하여 농사를 잘 지은 그 사람은 자신 앞에 닥칠 일을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오늘 밤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몇 년 동안 걱정 하나 할 것 없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습니다. 그 행복이 오늘로 끝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과 함께 재판정으로 가면서 자신이 분명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재판에 져서 감옥에 갇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재판정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정에 가기 전에 (예수님 말씀처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라도 용서를 받고 화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분명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몇 시간 앞도 분간하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생각한 것이 다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 앞에 닥칠 험난한 길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닥친 병과 약해짐을 준비하지 않다가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은 언제나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잘못한 다른 사람을 보면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하다가, 자신이 비난받을 때가 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잘 살피십시다. 화려한 포장지로 포장한 자신의 모습을 벗겨내고 하나님 앞에 진솔한 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십시다.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내 자신이 얼마나 죄악 덩어리인지, 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내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 존재인지를 바르게 들여다보십시다. 내가 분간해야 할 것은 천지의 기상상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이솝우화를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자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참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눈에 반해버린 사자는 그 아가씨를 뒤따라가 아가씨의 아버지인 농부에게 청혼을 하게 됩니다. ‘내가 당신의 딸을 사랑하니 당신의 딸과 결혼을 해야겠소, 만일 결혼 승락을 해주지 않는다면 당신 딸을 잡아먹고 말겠소.’ 

갑자기 사자의 청혼과 협박을 받은 농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허락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딸이 사자에게 잡혀먹을 것만 같고... 그래서 농부는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사정을 해서 사자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걱정 때문에 그 날 밤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께 사정 이야기를 들은 딸은 아버지를 안심시키며, 내일 사자가 오거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시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사자가 찾아와서는 “생각해 봤소?” 하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를 반겨 맞으며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내 딸도 당신처럼 성실하고 용감한 사자라면 결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사자는 예쁜 아가씨가 결혼을 허락해준다니 기뻐서 되물었습니다. “걱정이라, 무슨 걱정이오?” “저 말입니다. 내 딸도 당신을 좋아하는데, 당신의 그 날카로운 발톱이 무섭다고 하네요. 그 발톱이 무서워서 당신 가까이 갈 수 없답니다. 그 발톱만 뽑아 주시면 시집을 가겠답니다.” 예쁜 아가씨에게 마음을 뺏긴 사자는 ‘그거야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고서는 다음 날 오겠다고 하고는 되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사자는 자신의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농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의 용맹과 사랑을 추켜세우며 말했습니다. “한 가지 더 걱정이 있습니다. 실은 당신의 그 날카로운 이빨이 무서워 딸이 망설입니다.” 그러자 사자는 이번에도 ‘내일 오겠다.’고 말하고는 되돌아가서 이빨을 다 뽑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농부의 집을 찾아가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 딸을 달라’고 말합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몽둥이를 꺼내들더니 ‘지금까지는 네 놈의 발톱과 이빨이 무서워 꼼짝 못했지만,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다’며, 사자를 두들겨 패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빠져버린 사자는 더 이상 사자의 위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위엄 있는 성도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성도다움의 모습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도다움은 결코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을 크게 보이려는 교만과 거짓된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에 욕심을 내 우리의 자존심과 신앙의 가치를 뽑아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세상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아야 합니다. 
  
에이든 토저(Aiden W. Tozer, 1897-1963) 목사님이 쓴 『세상과 충돌하라』는 제목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 속에 파묻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 즉,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지혜롭게 살펴서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닮아서도 안 되고, 닮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하고, 세상이 주는 쾌락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즐거움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잘 분별하면서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로 살지 마십시다. 세상의 것은 분별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분별할 줄 알고, 세상의 것은 분별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때는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인으로 사십시다. 세상에 파묻혀 자신의 모습을 망각한 채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분간할 줄 아는 신앙인으로 사십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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