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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가 넘치는 삶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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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넘치는 삶 (마 20:1-16)


지금은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은 결과를 수확하며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교회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창조이고, 그 창조세계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원리가 있으며, 그 원리에 따라 심고 가꾸면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땀 흘리며 힘껏 일하고서도 우리는 그 모든 수확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그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재확인하곤 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일하며 살며 누리며 즐긴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감사에 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일꾼들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서 그 수고의 대가를 받는 일에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느 포도원에서 일을 마친 일꾼들이 그들에게 약속된 임금을 받고는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마당에 오히려 원망을 하다가 주인으로부터 면박을 당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은 오늘의 이야기가 천국에 관한 비유말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합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압축된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길게 풀어보면 아마도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마지막 심판을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게 될 때 벌어질 일은 어떤 것인가 하면 포도원 주인이 그가 고용한 일꾼들에게 임금을 나누어 줄 때 보게 될 일과 같은 바로 그런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갔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할 만한 사람들을 뽑아서 하루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본문 2절). 흥정은 아주 쉽게 끝났습니다. 모두가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좋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세 시간 후 다시 장터에 나갔습니다. 아마도 일손이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장터에는 일 없이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본문 3절).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본문 4절) 주인은 이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는 말 대신 “상당하게 주리라.” 했습니다. 하루 일할 수 있는 시간에서 세 시간이 줄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해서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품꾼들도 얼마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적절히 받게 되리라 믿고 일하러 갔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러고도 품꾼들이 더 필요했는지 세 시간마다 다시 장터에 가서 품꾼들을 데려왔습니다(본문 5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떨어지기 한 시간 전에 다시 장터에 나갔습니다. 

그때도 장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본문 6절)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에 주인이 말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본문 7절)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일렀습니다(본문 8절).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일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은 것입니다(본문 9절). 그들은 놀라기도 하고 너무나 기쁘기도 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지기와 주인에게 번갈아 절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와서 보다 일을 많이 한 품꾼들이 다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자기들은 더 받을 줄로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뜻밖에 그들도 늦게 와서 먼저 받은 이들과 꼭 같은 한 데나리온씩 받은 것입니다(본문 10절). 본래는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원망을 터뜨리게 된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본문 12절) 

그런데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유 있는 항변을 하는듯한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본문 13-15절)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포도원 주인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다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일을 일찍 와서 일 많이 한 품꾼들은 악하게 본 것입니다. 뭐가 어디서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오늘의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이야기는 천국의 비유이야기입니다. 포도원은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주인은 하나님이며, 품꾼들은 유대인들일 수도 있고 제자들일 수도 잇으며 오늘 우리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천국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포도원에 먼저 불려왔건 나중 불려왔건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들어와 일하고 품삯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천국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스스로 올 수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또 포도원에서 일을 많이 했건 적게 했건 무엇을 받을지는 전적으로 그 주인의 뜻이었던 것같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위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은혜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먼저 와서 일을 많이 한 품꾼들이 주인을 향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였습니다. 주인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정확한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을 불러준 주인의 호의가 아니었으면 정의든 정확한 계산이든 따지기 이전에 아무도 그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할 수 없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의 호의를 자기들의 정의와 정확한 계산으로 대치하여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죄인인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인간의 논리와 계산으로 바꾸어놓으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냉철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심판대로 하자면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말씀은 이러한 신학적이고 원론적인 구원론뿐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항상 감사의 삶의 살 수 있는 실천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비유말씀에서 포도원 주인을 원망한 품꾼들은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감사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른 아침 일거리를 찾아 장터에 나가자마자 곧바로 일거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거리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사랑하는 처자가 굶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근심 없이 하루 종일 안심과 희망 가운데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택함 받아 일하러 갈 때 다른 품꾼들이 부러워했을 사람들입니다. 특권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져도 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먼저 약속된 품삯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원망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보다 늦게 와서 일 적게 한 이들이 품삯으로 받는 것을 먼저 봤습니다. 그리고는 포도원 주인의 모든 품꾼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그의 고유한 권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이기적인 욕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뎠거늘 우리를 나중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그들과 같게 하였나이다.” 한 것이 아니라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즉 우리에게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너무 잘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들이 받은 것에 대한 불만족뿐 아니라 남들이 받은 것에 대한 질투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질투심이 늦게 와서 일 적게 한 사람들에게도 자기들과 꼭 같이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는 사랑의 관심이 그들에게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먼저 온 일꾼들은 늦게 온 이들이 너무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질투심이 드는 순간 그들 자신이 “종일 너무 더운 가운데 수고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즐겁기만 했던 일이 돌변한 것입니다. 갑자기 그 하루가 힘들고 짜증나고 억울한 하루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과 입술을 감사 대신 원망으로 가득 채우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죄와 허물투성이의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사랑하시고 조건 없이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시든 그의 뜻대로 다 “아멘”이고 “할렐루야”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또한 그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랑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안 사람이라면 우리의 형제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우리의 형제이웃의 사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다른 이들과 나눌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감사는 형제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감사할 줄 모릅니까? 하나님의 깊고 선한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이웃의 입장에 바꿔 서서 그들을 이해하며 공감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형제이웃에게 사랑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늘 생각하며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돌려드리며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가운데 지내며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더욱 더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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