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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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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오늘 우리는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과거 농경시대와 달리 현대는 산업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땅의 소산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농부가 아니더라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특별히 감사를 표현하는 절기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올해도 여러 면에서 쉽지 않은 한 해였습니다.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고, 각종 사건 사고로 인해 사회가 어수선해서 불안했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감사 생활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사의 조건을 풍성히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쉬지 아니하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교통을 나눌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반드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모든 일에, 모든 형편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감사할 일이 아니고 불평이 나올 만 한 경우에도 불평 대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데도 감사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질병에 걸려 아픈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이 다 범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억지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다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어떤 형편에서도 성도들이 받들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때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어둡던 마음이 밝아지고 불안하던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조건이 성도들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첫째가는 근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보다 더 고귀한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만나 마음이 힘들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이 같은 은혜를 생각하시고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온 우주 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십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힘들지라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이르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책도 없이 우리더러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선하신 뜻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전화위복시켜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통할 때는 물론이고 어려울 때에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성도님들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빌 4:6-7).

둘째로, 우리는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는 데 익숙하게 되어야 합니다.

사막에 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가시로 뒤 덮인 선인장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이나 새들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벌새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새는 그 긴 부리를 선인장 꽃에 쩔러 넣고서 꿀을 빨아먹고 산다고 합니다. 이 벌새는 우리에게 부적절하고 불만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만 갖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든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유대지역으로 출발하셨습니다. 베다니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장사지낸 후였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돌을 옮겨 놓게 하신 후에,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해서 문상 온 유대인들이 다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런 다음,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감사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이유가 있어야 감사하지요”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보다는 우리 마음의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믿음의 생각으로 채우면 어려운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난이 주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 대학수능을 치른 학생들 가운데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점수가 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편에 해당되든지 간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 점수가 낮게 나와서 진로를 수정하게 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실패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십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렘 10:2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일생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돈이면 못할 일이 없다는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하고, 돈 벌이가 된다면 못할 짓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는 돈 때문에 온갖 범죄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돈을 얼마나 벌면 만족할 것 같습니까? 솔로몬은 말씀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고 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한 아무리 많이 소유할지라도 결핍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만족이 없으니 아무리 큰 부자라도 그 마음은 거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 때문에 행복해 진 사람보다 돈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더 많습니다. 잠언 17장 1절에 보니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아니어서 불행해 지는 법은 없습니다. 반면에, 부자가 되는 바람에 불행해 진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돈 자체가 악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다만, 돈을 대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악의 도구도 되고 선의 도구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적을 가지고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벌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많이 벌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탐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탐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돈벌이에 집착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것까지 아깝게 생각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 인색하면서 부자가 되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곧 탐욕입니다. 그런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같이 권면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사랑하는 성도님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로 8절에 이르기를 “6)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실 만큼 청빈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는 데는 부요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물질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하다고 비굴하지 않고 부유하다고 거만하지 않으며, 궁핍해도 자족하고, 풍부해도 자족합니다. 이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환경과 형편에 좌우됨이 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범사에 감사하려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은혜를 쉽사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일평생 감사가 없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하신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삼으시고 충성되어 여겨 직분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년도 건강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대과(大過) 없이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으나 극복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도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여러분의 두 발로 걸어서 교회에 오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걸을 수 없어서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대로 소화를 잘 시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밝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사실을 감사하십시오. 푸른 하늘, 흰 구름, 산과 강, 나무와 꽃,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실을 감사하십시오.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십시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이 되었을 때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시각과 청각을 상실하였고 말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3중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만약 내가 삼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내가 삼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삶이 불만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이 될 때에 여러분 자신을 헬렌 켈러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일용할 양식과 쓸 것을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생활을 하려면 마음을 낮추고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볼 줄 알아야지, 나보다 월등하게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면 평생토록 행복을 맛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니까요. 결국, 자족하는 마음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감사의 조건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구원은 절대적인 감사의 조건입니다. 천지가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지옥 백성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마귀의 종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썩어질 세상 것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된 것,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감사가 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환경이나 처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적인 모든 행복의 조건을 상실할지라도 구원의 은혜 하나만 가지고도 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6편을 지은 성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2)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새록새록 생각이 나고 그 결과 마음속에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감사할 때 받는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감사는 소금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할지라도 소금이 빠지면 맛을 낼 수 없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감사가 없으면 열납되지 못합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감사가 빠진 기도는 마치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날아오를 수가 없습니다. 많은 예물을 바쳐도 감사가 빠졌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예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은 언제나 감사의 예물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는데,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 불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일 년에 강우량이 50밀리에 불과합니다.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곳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자연히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군데군데 있는 오아시스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으나 규모가 적어서 많은 군중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감사 대신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먹을 것은 이 만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박한 식물이 싫다”고 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광야의 여정은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이므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길이 험하다고 불평하고, 목이 마르다고 불평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를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가나안에 들어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출애굽 일 세대 사람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고, 그들의 자녀 세대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한편,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연합해서 쳐들어 왔습니다. 유대 왕국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잔불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백성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찬양이 시작될 때 적군들 사이에 무슨 오해가 생겼는지 자기들끼리 싸워서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성도들에게 위대한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셋째로, 감사할 때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불평하기 시작하면 보이는 것이 다 불평거리로만 보입니다. 밤을 새워서 불평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 시작하면 자꾸만 감사할 일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의 조건을 더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해서는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눅 19:26).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이 시간부터 감사를 생활화하겠다는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추수감사절 하루만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아니라 일 년 365일 내내 감사하는 날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좋은 일, 형통한 일을 만났을 때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마다 매일의 삶을 통하여 감사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을 풍성히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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