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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나님을 잊지 말자 (신 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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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잊지 말자 (신 8:11-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마음에 부담감부터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추수감사절 헌금 때문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하라는 절기인데 잔뜩 부담감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헌금보다 우선하는 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느껴지면 물질로 표현하시고,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일이 없으면 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하는 헌금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먼저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십시오.
‘주님’이라고 이름만 불러도 콧등이 시큰해지는 고마움,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격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지 아십니까? 
감사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적어도 1년에 세 번은 ‘감사’를 생각하는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23:14-16)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절은 성경의 이름으로 수장절입니다.
한 해 동안 지은 농사의 곡식을 추수하여 창고에 모아 저장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런 추수감사절을 더 의미 있게 한 것이 미국의 청교도들이 드린 추수감사절 예배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을 위해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절 예배를 잠간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1620년 9월16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이(Puritans) 메이플라워(May Flower)라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상선을 타고 망망한 대해 대서양을 66일간 항해하여 1620년 11월21일 신대륙 (미국이지요!)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추위와 풍토병 그리고 인디언들의 습격이었습니다.
첫 겨울을 지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50여명이었습니다. 
반이나 죽었던 것입니다.
봄이 되자 장정 21명은 필사적으로 농토를 개간하여 씨를 뿌렸습니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해보니, 대부분의 씨앗은 풍토에 맞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맺혀진 열매마저도 병충해로 제대로 영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곡식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옥수수, 보리, 강낭콩, 감자가 풍성하게 하시고, 사냥할 수 있는 산림을 주시고, 조개와 물고기가 많은 바다를 주시고,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죽지 않고 살려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드린 추수감사절 예배였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이 1789년에 믿음의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11월26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킬 것을 선포했고, 다시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지킬 것으로 개정했으며, 1941년 미국 국회에서 11월 넷째 목요일로 정해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설교한 세 편의 설교 중의 하나입니다.
신명기는 ‘말씀의 반복’이란 뜻으로 시내산 언약의 주역인 구세대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된 후, 신세대가 가나안 정복의 주역으로 등장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교육 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성경입니다. 
그 내용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귀중한 영적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잊지 말자.

사람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11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4절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19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

어느 선교단체는 비전트립에 참여하는 멤버들이 꼭 지켜야 할 규정을 정해놓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2시간마다 기도하는 일입니다. 
time-keeper가 멤버들에게 ‘기도시간입니다.’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멤버들은 그 자리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느끼는 것은 그 짧은 2시간 동안에도 하나님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직장생활이 아니고, 선교하겠다는 비전트립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잊고 지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11:25-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이기에 어린 아이들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알게 하셨을까요?
어린 아이들은 순진하기 때문입니까?
어린 아이들은 잘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이런 비유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다가 깰 때 엄마가 없으면 웁니다.
엄마를 찾을 때까지, 엄마가 올 때까지 웁니다.
그렇지요?
먹을 것을 줘도 울고, 장난감을 줘도 웁니다.
옆에 친구들이 있어도 웁니다.
그렇게 울던 아이가 엄마를 찾으면 그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엄마 없으면 엄마가 올 때까지 우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질 때까지 무릎을 꿇고 탄식하며 우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너무 괴로워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질 때까지 무릎 꿇고 탄식하는 그런 갈망이 있나요? 
다윗처럼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호소하나요?(시52)
아니면 마냥 하나님을 잊고 삽니까?

지난 주 가평에서 열린 ‘이슬람 파트너십’ 세미나에 카자흐스탄 선교사 한 분이 보고했습니다.
보고 중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카자흐스탄 말에 ‘외식’이란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얼굴이 두 개다.”입니다.
이 얘기를 했더니 카자흐스탄 자매가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더랍니다.
“우리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얼굴이 두 개가 아니라 백 개입니다.”
상황마다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예배드릴 때 다르고, 시장 볼 때 다르고, 아이들을 대할 때 다르고, 사업할 때 다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얼굴이 백 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백 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고 산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얼굴은 몇 개입니까?
우리의 얼굴은 한 개입니까? 백 개입니까?
화날 때나 기분이 좋을 때, 기쁠 때나 슬플 때, 일이 잘 풀릴 때나 일이 꼬일 때, 건강할 때나 병들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붙드심을 믿고 평온한, 한 얼굴로 사십니까?

2. 언제 우리는 하나님을 잊기 쉬울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잊는 문제를 우리의 의식주에서 제기합니다.
12-13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의외가 아닙니까?
의식주는 누구나 다 경험하는 보편적인 것이고, 누구나 다 갖춰야할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 의식주 부문에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볼 때, 군대에 갈 때, 결혼을 할 때, 직장을 구할 때, 진급할 때처럼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만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아요.
잊었던 하나님을 기억해냅니다.
그러나 춘하추동 옷을 갈아입고,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식사를 하고, 사글세방이지만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 잠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잊기 쉬어요.
쉽게 말하면, 등 따듯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봐도 그렇습니다.
춥고 배고플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겨울 철 새벽기도회, 차가운 마루바닥에서 발이 얼고, 무릎이 어는 줄도 모르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개인당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넘어서자 하나님을 잊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언제 옵니까? 
가난할 때입니까? 환란을 당할 때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며, 소유가 많아질 때입니다. 

풍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풍요 속에서 어느덧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안락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안락함에 젖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식어집니다.
그래서 그때가 신앙의 위기입니다. 

솔로몬 왕을 보십시오.
그가 처음 왕으로 등극했을 때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습니까?
일천번제를 드렸잖아요? 
그러던 그가 살만해지니까 그의 마음은 어두워졌고, 그의 지혜는 무디어졌고, 그의 영은 흐려졌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3.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주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17절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우리 신앙인들 중의 대부분은 의식주는 인간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인간의 노력의 결과입니까?
잘 따져보세요?
모세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을 구체적인 예로 듭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누가 물을 주셨는가?

15절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누가 먹을 것을 주셨는가?
16절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만나를 주셨는가?
누가 물을 주셨는가?

4. 의식주 문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누구나 다 경험하는 보편적이고, 누구나 다 갖춰야할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것조차 누리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에 병이 들면 어디 가서 쌀 한 톨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가면 밥 한 끼 못 먹을 줄 아느냐?”고 큰소리치지만 밥 한 끼 먹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밥한 그릇을 받아놓고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시원한 물 한 대접을 마시고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작은 집이지만 몸을 누이면서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지난해 봄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한 한진중공업사태가 있었습니다. 
35m 높이의 타워 크레인에서 309일간 장기농성을 하며 ‘희망버스’를 등장시킨 한진중공업사태는 지난해 11월 정치권의 중재로 일단락됐습니다. 

그 후 1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9일 정리해고자 가운데 복직할 수 있게 된 97명이 첫 출근을 했습니다. 이날 한 복직자는 “아무리 힘들고 불만스러워도 매일 아침 출근할 일터가 있다는 사실의 행복감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잊고 살았던 과거에 대한 자책이었습니다.우리 주변에는 감사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숨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기지개를 켜는 것, 길거리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 아내와 아이들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일상의 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복음성가-약한 자로 강하게

5.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감사하는 인간(Homo Gratia)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바른 사람이 됩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마귀가 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마귀는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따르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둘째, 마귀는 웃게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상을 찡그리고, 화를 내고, 슬퍼하게 할 수 있지만 결코 웃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셋째, 마귀는 감사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불평, 불만, 더러운 욕, 비난을 할 수 있게 하지만 감사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존 웨슬리는 신자의 ‘세 가지 표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감사로 출발해서 감사로 끝납니다.
미국의 심층 뉴스 TV프로그램 ‘인사이드 에디션’의 진행자로 유명한 데보라 노빌은 저서 ‘감사의 힘’에서 위대한 성공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데 0.3초밖에 걸리지 않는 답니다. 
그래서 0.3초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0.3초의 기적을 만들어 내십시오.
사람은 감사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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