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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실존 (창 3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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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실존 (창 32:1-12)

 
내 용 

야곱은 아주 훌륭한 조상을 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이삭의 아들입니다. 유대 민족의 유일신 사상이라는 것은 사실 아브라함으로부터 생겨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요 열국의 아비라고 영적 의미를 하나님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자손됨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 집에 가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집도 아브라함의 후손임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신약 성경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할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던 그 장소에는 아주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습니다. 그 바위에 영적 의미가 부여되어서 흔들리지 않는 반석, 영원성, 불변성, 믿음의 상징이 되어서 그 바위를 놓고 역사에 얼마나 치열한 소유권 전쟁이 있어 왔는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교도들이 그 바위를 중심해서 큰 사원을 건축해서 그 건물이 항상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예루살렘 중앙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의미를 “반석”이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 고백을 들으실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변함없는 바위로 표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반석과 예수님의 반석은 똑같이 하나님을 향한 불변의 신앙 표현입니다. 야곱은 할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했고 이삭은 평화의 사람으로 누구와도 불화를 맺지 아니하는 모범적 화평의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했다면 손자도 자연히 가정에서 생활 교육 가운데 충분히 그 훌륭한 점을 본받았을 터인데 야곱은 좀 돌연변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에 대한 평가는 몇 가지로 나타나는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을 한번 만나면 절대 놓지 않는 끈질긴 인내력이 평가를 받고 있고, 또 하나는 축복권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자기가 끝까지 성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부정적 평가로서는 쌍둥이 형제인 형 에서의 운명을 가로챈 사람입니다. 또, 이 사람은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서슴지 아니하고 사용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고, 상대방의 표현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위기를 만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위기가 해결하면 언제나 제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야곱이 있는 곳에는 항상 싸움이 있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28장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심각하게 만나는 기록이 나옵니다. 에서의 운명을 가로챈 그 죄 때문에 형의 분노를 견딜 수가 없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와 신앙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한을 넘겨받았다는 그 이야기가 법적 효력이 있는가? 만화책 같은 이야기인데 무엇이 그렇게 심각했는가? 하지만 당시는 아주 심각한 장자권 문화입니다. 성경에 장자권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장자권은 재산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정의 장손, 즉 장자는 그 가정의 모든 재산권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혜택이 있었던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데 유대 나라는 언약 문화입니다. 너와 내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을 하나 건네주었으면 그것이 곧 법입니다. 하나님도 언제나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과 에서는 피차 약속했습니다. “너와 내가 이렇게 약속하자. 장자권 넘겨주겠다.” “나는 넘겨받겠다.” 물증으로 무엇을 주었습니까? 팥죽 한 그릇을 물증으로 먹이고 먹었습니다. 저는 이민사회에서 오래 살았는데 이민사회에 사는 이민자들이 가끔 하는 일이 있습니다. 

본국에서 무슨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된 재산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매각해야 되는데 외국에 와서 살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면 한국에 나와서 수속하는 기간, 사인하고 복잡하니까 쉽게 처리하는 방법으로 재산 포기 각서라는 것을 영사관을 통해서 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형제들이 “형! 이런 것을 매각하려고 하는데 형이 나올 수 없으면 재산 포기 각서를 사인해서 보내십시오. 그러면 이것을 잘 처리해서 형님의 몫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포기 각서를 사인해서 보내줍니다. 저도 포기하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포기각서를 보내면 그 권한은 그 시간으로 상실됩니다. 법적으로 나는 아무 효력을 발할 수 없습니다. 에서는 지금 동생에게 재산 포기 각서를 써 준 것입니다. “그래! 네가 장자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대신 뭐 줄래?” “팥죽이 있습니다. 잡수십시오.” 그래서 에서가 그것을 먹고 일을 끝냈습니다. 제도적 장치를 기회를 봐서 잘 마련한 야곱의 지혜인지, 사기꾼인지 모르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더 확실하게 제도적 장치를 잘 해 놓았습니다. 아버지가 이 장자권에 대해서 축복기도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축복권이 유언입니다. 유언을 2가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장자에게 해주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야곱이 가로챘지 않습니까? 이상야릇한 짓을 해서 에서처럼 꾸며서 축복해달라고 해서 이삭에게 모든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나중에 에서가 와서 축복 기도해 달라고 하니까 “내가 이미 유언을 다했다. 

아까 온 사람이 네가 아니고 누구냐?” 이것은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포기한 일이고 아버지가 제도적으로 축복을 다해버렸으니 할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때는 방법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폭력을 쓰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을 어머니가 알아냈습니다. “야곱에게 큰일 나겠다.” 그래서 어머니가 야곱을 도망치게 한 것입니다. 한 달이나 걸려야 갈 수 있는 브엘세바에서 하란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지도를 보시면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나라 남쪽 끝입니다. 유대 땅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지금의 시리아를 거쳐서 터키 땅, 이곳이 하란입니다. 그렇게 멀리 도망을 간 것은 거기 외갓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삼촌을 찾아 가라. 그리하면 네가 밥은 먹고 살 것이며 죽음은 면할 것이다.” 그래서 그 험난한 길을 외롭고 두렵게, 배고프고 피곤하게 가다가 들판에서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자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켜주옵소서.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옵소서.” 그렇게 아주 심각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가지고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기도를 다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무엇인가? 야곱이 20년 만에 이번에는 반대로 하란을 도망쳐 나오는 것입니다. 고향인 브엘세바로 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에서가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는데 이번에는 외삼촌 라반이 죽일까봐 밤중에 도망을 쳤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잘못이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속임수를 칩니다. 어쨌든 잔머리 굴리는데 명수입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야릇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아주 기가 막히게 잔머리 굴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이 어찌 되었는지 지금 야곱은 자신이 목적한 모든 것을 이루어서 금의환향의 노래를 부르면서 20년 만에 고향땅으로 지금 오고 있는데 매우 불편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20년 전 피해자 에서가 400명의 훈련된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마주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고향에 가자니 에서가 죽일 것이요 하란으로 돌아가자니 라반이 죽일 것입니다. 양쪽 다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야곱의 실존은 무엇인가?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위기가 올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여기 야곱의 현실이 7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평소에 그가 생각했던 행복관이 성경에 아주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내가 행복하게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예쁜 여자와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인인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 동안 막노동을 했습니다. 그 값으로 라헬을 얻었지 않습니까? 

왜?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많은 여자와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4명의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식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사기꾼처럼 노력을 열심히 한 것은 물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생명을 무릅쓰고 많은 재산 증식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들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야곱과 같은 행복관을 지금도 가지고 살아간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원했던 것을 지금 다 가지고 있는데 뭐가 두렵고 답답한 것입니까? 왜 불행의 실존이 되었는가? 오늘 말씀 이하를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야곱이 자신의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또 잔머리를 굴립니다. ‘돈을 많이 주면 형의 마음이 풀어질 것이다.’ 그래서 야곱이 자기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향하여 예물을 택하니 그 예물의 규모가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렇게 많은 선물을 했습니다. 

유목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가축이 곧 재산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형한테 선물하기로 한 규모가 재벌이나 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그 아득한 옛날에 이 정도는 한 국가의 재벌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550마리의 가축을 형에게 선물주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겠다.” 

여러분! 지금 이렇게 경제가 발전한 이 시대에도 여러분의 형제들 가운데 “형! 크리스마스야! 내가 선물 줄게. 황소 한 마리 가져가.” 그런 동생 계십니까? 요즘 황소 한 마리가 700만원 정도 한다고 하는데 형이나 동생에게 700~800만원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거 형 가져. 동생 너 가져라.” 그럴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550마리의 가축을 형에게 다 가지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재산을 모아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한 그의 행복관이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두려움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가 그의 마음에 하나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실존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그토록 14년이나 노동을 하면서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예쁜 아내 라헬이 옆에 있습니다. 야곱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언제든지 준비하며 정성스럽게 있어 줍니다. 하나가 싫증이 나면 레아라는 여자가 또 있고 연령적으로 보면 아들, 딸보다도 나이가 젊은 부인인 빌하와 실바가 불러줄 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 그 많은 재산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우리가 봉사해 드리겠습니다.”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렇게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지금 부담이 됩니다. 자신의 실존이 지금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가를 비로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때 가족들은 누구도 야곱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아버지가 저렇게 고민할까? 이렇게 많은 행복의 조건을 다 가지고 지금 고향을 찾아가시는데 무슨 고민이 많아서 저렇게 불편해하고 더군다나 하나 밖에 없는 쌍둥이 형님을 만나러간다고 하면서 이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아무도 모릅니다. 야곱 혼자만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형 에서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겠습니까?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족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야곱은 혼자만의 고민을 안고 도움이 안 되는 소유와 가족들이 오히려 지금은 원망스럽게 생각됩니다. 

어떻게 생각이 되겠습니까? ‘어휴! 이런 때 나 혼자라면 도망을 가버리고 말텐데 이제는 도망도 갈 수 없고 이거 어떡하느냐?’ 자기 얼굴만 바라보는 17명의 가족과 종들의 시선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서 모아둔 이 모든 공동체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여자들은 이 모양으로 많이 얻어두고 자식을 이만큼 많이 낳았나? 이게 다 지금에 와서는 나에게 짐이로구나. 이런 때 나 혼자만 형을 피해서 멀리 멀리 도망가 버리면 괜찮을 텐데.’ 그래서 야곱은 또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떼를 둘로 나눕니다. 

8절에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죽여 버리면 그것을 보고 남은 한 떼는 도망가라. 그러면 우리 중에 반은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계산을 했습니다. 아마 이 상황은 가장들이 가끔 어떤 경우를 만날 때 느끼는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장들이 고민에 빠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좌절과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 ‘아! 나 혼자 살 것을 이 많은 가족들을 내가 어떻게 하나? 내가 행복하다고 모은 이것들이 나에게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는 도망도 갈 수 없고 해결 방법이 없는 그 실존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과정에서 간혹 이런 고민하는 시간이 찾아오는데 저는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 영적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정말 하나님을 심각하게 만나는 때는 언제인가? 누구도 나의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자기 판단이 될 때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20년 전 벧엘이 기억에서 새로워졌습니다. 20년 전 똑같은 문제로 브엘세바를 떠날 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는 20년 동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9절에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습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위기에서 초월자를 찾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기 비로소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께서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지금 내게 와 있음에 대한 고백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감당해야 될 하나님을 위한 일을 감당하지 아니한 회개 두 가지입니다. 28장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소원했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의 1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도 안했습니다. 그 고백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서 모두 다 주셨는데 나는 한 일이 없사옵니다.” 20년 전 하란을 떠날 때 도망갔던 자기 모습이 떠올라 “내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는데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신앙 고백을 하는 겁니다. 결국 지금 야곱의 고민 불안은 그의 영이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20년으로 돌아가서 회복시키는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자리가 없어서 길바닥에서 돌베개를 하고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던 자기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지팡이 하나를 들고 갔던 그 길을 이제는 이렇게 많은 떼를 거느리고 오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응답해 주셨나이다.” 이 대목은 누구든지 그렇게 해석합니다. 야곱은 얻으려는 이기심 있는 신앙심을 가졌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 신앙과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절대 베풀지 아니하고 절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불편해지면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가지고 있는 소유가 다 두렵고 무섭고 오히려 귀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20년이 지난 후 기도를 드리는 야곱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때와 똑같이 대우하십니다. “여기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 죽이기 위해 오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를 동원해서 야곱 보호에 나섰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또다시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 해결되면 또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신앙, 약속해놓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야곱의 실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내 영혼이 이렇게 답답할까?’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편하지 않아서입니다. ‘왜 편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은혜에 내 영이 감사하고 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도 한번 야곱과 같이 평가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지팡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떼를 이루게 하여 주셨나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야곱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받은 것은 엄청납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어느 때 우리가 돈이 없어서 괴로운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내 주변에 아주 풍족히 잘 준비가 되어 있다 하여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깨어지면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나의 고민거리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다른 것들이 내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것들이 풍족하여도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는 야곱의 마음을 보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위기를 자꾸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을 놓치지 않는 길은 이것이다.” 그래서 야곱이 죽을 고비를 그렇게 많이 넘기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래야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습관이 있구나.” 그래서 야곱의 생애가 그렇게 험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공하십니다. 

마침내 야곱은 나중에 성직자와 같이 말년이 변하지 않습니까? 그 과정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옛날같이 지팡이 하나만 들고 홀몸이면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그는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비교하면서 실존의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눈물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20년 전 기도를 또 다시 드리고 있습니다. 옛날과 똑같은 경우를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또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칼부림할 줄 알았던 형제는 얼싸안고 울었으며 야곱은 그렇게 무섭게 느껴졌던 에서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십니다.”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변합니다. 그런데 내 습성이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을 찾는 그런 나쁜 습성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라도 끝까지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이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으면 자꾸 위기가 오지 않습니까? 평소에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확실한 영적 대답이 나옵니다. 

11월은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라서 우리가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게 되는데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팡이 하나를 들고 요단을 건너온 사람이 아닌가? 그때 하나님을 만나서 영적 세계 조상으로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섭리를 내가 고백할 수 있지 아니한가? 여기 6·25 동란 때 남한으로 월남하신 분들은 ‘아! 그때 내가 지팡이 하나 들고 대동강 철다리를 넘지 않았는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새까맣게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여기 많은 사람들이 “여보! 우리 결혼할 때 연탄불 펴는 단칸방에서 살지 않았소? 지금은 맨션에서 살고 있지 않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렸는가?” 사람들이 다 야곱과 같이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주변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과거의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지금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들어간다는 소리를 하는데 “나는 약속을 지켰다. 내가 그렇게 해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네가 지금 네 주변에 떼를 이루고 있는 이 많은 것은 네가 기도했던 대로 내가 응답한 거 아니냐? 너는 왜 깜깜하냐? 너는 또 다시 위기를 만나야 하겠느냐?” 이렇게 우리가 답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할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아니하면 위기를 만나게 되고 이렇게 평화스러운 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면 전쟁을 만나게 됩니다.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추수감사절 절기를 앞두고 이런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아! 야곱이 그렇게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으면서도 감사는 평생 잊어버리고 살았다.’ 나중에 야곱은 모두 다 회개하고 성직자와 같이 되어서 열 두 아들을 축복해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감사의 달 11월이 여러분 영혼에 풍성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경우는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주시고 아버지가 베풀어주신 내 주변의 이 모든 내용을 점검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야곱이 형에게 바쳤던 그 많은 물건을 평소에 하나님께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볼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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