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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교회, 출생의 순간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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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화해와 평화운동을 향하여

- 김영한 원장 (숭실대학교 기독대학원)

원산을 선교지로 함께 활동을 하였던 캐나다 장로회 매컬리(I. H. McCully), 미국 남감리회 소속 하디 선교사와 하이트(Mary C. White)등은 부흥운동에 힘입어 한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원산 선교사들의 연합모임은 1905년 9월 ‘한국 복음주의 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stic Missions in Korea)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 모임의 결성으로 초교파적 연합 기도회와 성경공부 모임이 더욱 활성화 되었다.

초교파적 부흥운동은 교회일치운동으로 이어졌다. 원산부흥운동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1905년에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국에서 만큼은 하나의 개신교로 ‘조선 예수교회’를 조직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선교사들이 본국 교회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국에 진출한 여러 교파와 교회 선교사들이 ‘대한 복음주의 선교회연합공의회’를 조직하고 성경과 찬송가 등 기독교문서 발행, 병원과 학교 운영 등에 연합과 협력을 하기 시작했다.

1906년 서울의 영적 각성운동에서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서 강단을 교류했다. 장로교회 목회자가 정동감리교회에서 설교하고, 감리교회 목회자가 장로교회에서 설교했다. 1907년 1월 사경회도 평양 시내에 4교회가 연합으로 가진 1월 6일부터 열린 저녁집회에서 첫날부터 성령의 역사가 임했고 14일과 15일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났다.

공동체 의식이 집결되자 개교회는 교단 조직으로 발전해갔다. 침례교회는 이미 1906년 대한기독교로 명칭을 정했다. 장로교회는 1907년 남북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한국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이 독노회가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됐다. 각 선교부는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그동안 추진해왔던 선교지역 조정(Comity Plan)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남감리교회와 북장로교 선교부의 합의로 강원도 북부의 2/3와 서울 이북의 경기도 지방은 남감리교회가 맡고, 강원도 남부 1/3과 서울의 동쪽과 서쪽은 북장로교회가 맡기로 합의했다. 1908년에는 남감리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이 합의로 원산 이남 함경도 지방은 남감리교회가 맡고, 기타 함경도 지방은 캐나다 장로교회가, 서울 이남 충청북도 지방은 북장로교회가, 충청남도는 북감리교회, 전라도는 남장로교회, 경상도 북부는 호주 장로교회, 그 나머지 지역은 북장로교회가 맡기로 합의했다.

1910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참여하는 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The Evangelic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가 서울에서 모였고, 여기서 “백만인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A Million Souls for Christ)라는 전도 목표를 채택했다. 숭실 학당의 창설자인 초대학장 베어드(William Baird)선교사는 이 운동에 관하여 다음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온 교회가 확고한 믿음과 유례없는 열정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전례없이 복음이 전국적으로 전해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것이 알려질 때 100만인 이상이 100만인 구령의 해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교회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양적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 오늘날의 현실에 대하여 양식있는 신앙인들의 성찰은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망한다’ ‘종교개혁과 같은 대변혁이 없이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양적 팽창 속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영적 안일과 나태함을 말하는 것이다. 1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교회의 운영과 사업은 세속적 물량주의, 과시형 업적주의, 당파적 경쟁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냉소적 비판을 받고 있다.

1907년 영적 대각성 운동은 교인수 증가나 교세 확장을 위한 전도운동이 아니엿다. 이미 믿는 신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삶이 바뀌는 윤리적 결단이 있었다. 이어 백만구령운동(1910-1911)은 영적각성운동(1907) 후에 전개됐다. 1907년의 영적각성운동은 믿기 시작하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깨우고 바른 신앙을 각인하는 운동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병폐되는 회개와 중생과 성화로 이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보다는 기복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신앙의 본질로 가르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이미 1903년부터 회개와 기도의 준비에 의하여 일어난 영적 각성운동의 결실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1907년 대부흥의 재현을 바란다면, 당시에 있던 ‘말씀을 공부하는 사경회’, ‘기도모임’,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통한 회개운동’이 있어야 한다. 과시적인 큰 행사나 세미나, 대형집회는 기념식으로 끝나고 진정하게 대부흥의 재현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개인기도와 가정예배와 새벽기도회, 특히 사경회를 통한 기도회, 금식기도회, 철야기도회 등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부흥운동의 길은 누구에게 있기 보다는 각 개인(지도자 그리고 평신도 개인)의 겸허한 회개와 기도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성령의 운동이다. 신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철저히 자신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고, 나아가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와 민족의 허물과 죄악을 내 죄악으로 여기고 가슴치고 통회하는 참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럴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가 정화되는 열매가 나타난다.

이것을 위해서는 당시와 같이 평신도에게 미루지 말고 교회 지도자의 솔선한 수범이 필요하다. 지도자가 먼저 겸손하게 낮아져서 성령의 임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할 때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교인들의 회개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단지 종교적 개인의 경건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삶이 윤리적 정화의 열매로 나타나고, 이웃과 사회를 향한 봉사와 헌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영적대각성운동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비정치화의 길로 나가게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당시의 운동은 민족적 시련과 위기를 놓고, ‘이 위기가 국가적 축복의 수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족의 살 길을 바로 ‘민족 복음화’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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