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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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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달익 (서문교회목사)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은인이 있다면 그는 단연 바나바일 것이다. 다메섹 길에서 회개한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그 누구도 바울을 영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를 친절히 안내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하는 등 정성을 다해 회개한 그를 품으려 노력했다. 바울이 다소로 낙향해 오랜 세월 은둔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함께 일하도록 배려한 사람도 바나바였다. 그뿐 아니라 밭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사도들에게 맡긴 사람도 바나바였다.

그의 이런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4장 36절에 따르면 그는 구브로 태생의 레위족인이었다.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그가 예수를 따르게 되었을 때 그의 가문으로부터 어떤 처우를 받았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아마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결단이 있어야 했을 것이고, 이런 그의 경험은 바울에 대한 배려와 가난한 자들을 향한 섬김으로 열매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역시 냉정하기 그지없고 배려가 없는 이해타산만 강조되는 듯해 안타깝고 죄스럽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 수준을 넘어 지나친 것에 대한 죄의식이 없고, 근거 없는 루머를 생산하고 확대 재생산해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줘도 미안함을 모르는 몰염치가 우리 주변에 팽배하다. 사법 당국에 의해 무고죄로 처벌받은 사람의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통계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천박한 이기주의가 판치기 때문이고 타인에게 피해 끼치는 일의 악마성을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히 믿음의 길을 걷는 신앙의 대인을 만나기가 어렵다. 교단의 큰 모임에서는 늘 송사 문제가 가장 힘든 일로 등장한 지 오래됐다. 조금도 양보를 모르고 끝 없는 법리 논쟁을 계속하는 사이 당사자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그 영혼이 황폐해지고 교회 문화는 저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현상들의 저변에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런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 얽매여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결국 신앙의 절대적 가치를 알고 있지 못한 채 신앙을 대물림받거나 신앙인으로 살기 위한 치열한 고뇌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함 때문일 것이다.

신앙인 삶의 근본은 용서와 상호 존중, 이에서 비롯되는 타자 중심의 배려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삶이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며 여기에서 복음의 능력은 세상을 감동시키는 힘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제사장 가문의 명예와 권력을 버리고 파문과 멸시를 감수하면서 예수를 따랐던 바나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면서 초기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가 되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우리 교회에 바나바 같은 사람이 그립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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