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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선한 사마리아인 포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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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4월 유진 벨목사와 함께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오웬 선교사가 순회 선교 도중 광주에서 급성 폐렴에 감염되었습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의사를 보내어 달라고 급한 전보를 쳤습니다. 전보를 받은 포사이트(Forsyte:1873-1918) 선교사는 1909년 4월 4일 조랑말을 타고 광주를 향해 떠났습니다.

광주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길가에 방치된 한센병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은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위독한 동료 선교사를 치료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는 길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그녀를 감싸 안아 자신의 조랑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로 들어갔습니다. 오웬 목사는 이미 운명한 상태였습니다.

포사이트는 그 곳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윌슨을 찾아가 그 여자의 치료와 거처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거처할 곳이 없어 고심 끝에 광주 변두리의 벽돌 굽던 가마터에 그녀를 옮겨두고 침구와 옷가지를 주어 거처하게 하고는 목포로 돌아갔습니다.

포사이트의 행동에 감명받은 윌슨 선교사는 이들 환자를 치료하고 병원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이 일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우선은 광주시민들의 항의가 심했습니다. 한센인들을 위한 병원은 필요하나 광주 한복판은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 수 없이 한센인들을 위한 수용소를 따로 세우기로 하고 1912년 광주 효천면 봉선리에 한센병원을 세웠습니다. 포사이트 선교사의 선행 4년만의 결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한센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은 돈을 모아 광주 한센병원에 포사이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의 퇴거 명령에 따라 현재 위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로 이전해야 했습니다. 광주에서 여수로 한센병원이 옮겨질 때 환자들은 광주에서 여수까지 상여를 매듯 포사이트 기념비를 어깨에 메고 보름동안이나 밤길을 걸어서 옮겼습니다.

병원이 옮기진 때부터 ‘애양원’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애양원 바로 뒤에는 애양원 교회가 있고 그 뒤에는 한센병 환자와 한 평생 함께 한 손양원 목사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칭송되는 포사이트는 1873년 12월 25일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졸업한 후 1904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 중 괴한에게 납치되어 귀를 잘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풍토병에 감염되어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게 되자 미국으로 되돌아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7년간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과 한센병 환우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다 귀를 잘린 후유증과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 5월9일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었습니다. 그의 나이 45세이었습니다. 낯설고 물 설은 곳이지만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33-4]

- 정충영 박사(경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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