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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고아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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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로 사회사업가이신 소다 가이지(會田 嘉伊知)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지겐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서울 후암동에 가마구라(謙倉) 고아원을 1913년에 창설하였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1945년 8. 15 해방될 때까지 운영하면서 고아를 돌아보고 길러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해방과 더불어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고아원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심하다가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님이시라면 고아들을 잘 돌아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님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1948년에 서울보린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습니다. 
6.25가 일어나므로 모든 고아들이 흩어졌다가 “영락보린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쟁고아들을 많이 수용하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소다씨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가 청일전쟁 후에 대만에 와서 독일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과로와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를 조선인 청년이 근처 여관이 데려다 눕히고 여관비까지 부담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로 조선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였고, 
월남 이상재선생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우에노 다끼와 결혼하면서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라는 욕을 먹으면서 한일합방을 반대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그가 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남산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스파이라는 욕을 먹고, 
일본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32년 간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1300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공부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일본 사람이 순수한 기독교정신, 사랑을 가지고 고아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다씨는 한국을 위하여 살다가 죽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였는데, 
그가 죽기 전에 1961년에 영락보린원으로 와서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962년 3월 28일에 9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였고, 
그의 유해는 마포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아닌데, 우리 사회장으로 국회의사당 마당에서 장례를 지내고, 
우리 정부에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의 묘비는 크지 않습니다. 묘비 전면에는 “會田嘉以知先生之墓”라고 쓰여 있고, 
옆면에 “언 손 풀어주고 쓰린 가슴을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는가 마음 둔 곳 기어늘”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한국을 고향을 생각하며 살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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