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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만과 영적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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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목사)

"오만의 극치다" 작년에 한 정치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만 해도 격렬하게 들렸는데, 요즘은 당파적으로 조금만 의견이 맞지 않아도 사용하다보니 도매급으로 전락한 말이다. '오만'은 교만과 멸시와 업신여김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어디 하나 좋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인 단어다. 여기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끝자락인 '극치'라는 말이 붙었으니 '오만의 극치'라는 말은 참으로 모욕적인 말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대놓고 쓰는 인간 자체가 본래 오만이 극에 달한 존재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인간의 오만은 하늘까지 오르려는 바벨탑을 쌓다가 산산조각이 났다. 인간이 오만한 존재라는 사실은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신은 죽었다'는 고전적 무신론을 넘어 "신이 인간을 망친다'고 주장하는 한줌거리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요즘의 현실은 인간이 어디까지 오만 방자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심판의 우렛소리로 임할 것이다.

오만한 자의 모습은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의 얼굴과 닮아 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온갖 소란을 떨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사방팔방으로 손발을 휘두르면서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덫에 갇힌 동물처럼 몸부림을 칠수록 더욱 옥죄일 뿐이다. 이처럼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삿대질하면 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영적 허무요 절망이다. 이런 점에서 무신론자의 대부격인 니체가 허무주의의 덫에 빠져 인생의 말년을 자신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결국은 정신병원에서 불행하게 죽은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다.

오만이 허무주의의 덫에 이르는 길이라면, 그 대척점인 겸손은 영적 자유함으로 들어서는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겸손은 절대자 앞에 서는 경험을 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적 속성이다. 인간이 주어가 되는 인위적인 겸손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오만의 얼굴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겸손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참 자유에 이르는 황금문이다. 세상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를 얻으면 자유를 누릴 것처럼 기만하지만,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진리의 자유대헌장을 선포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대천덕 예수원 원장님은 필자의 마음에 겸손으로 영적 자유를 누린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노년에 폐에 물이 차는 심각한 증상으로 입원했을 때이다. 한 젊은 자매가 병실을 방문하였고, 깊은 고통으로 한 숨도 자지 못한 원장님에게 "기도하셔야죠"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원장님은 병상에 납작 엎드려 "자매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대천덕 원장님은 영적인 거성이요 평생을 기도로 사신 분이다. 그런 분이 한참이나 나이 어린 자매의 기도에 무릎꿇고 "아멘, 아멘"으로 반응하였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어떻게 인간을 영적인 자유함으로 이끄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강원도 예수원에는 195cm나 되는 거구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겸손하게 묻혀 있다. 그 묘지 앞에 설 때마다 사람들은 "주님,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작아지고, 보이지 않고, 내가 없어지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고백한다.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대천덕 원장님처럼 낮아짐으로 영적 자유를 누리는 이 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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