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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슬림, 왜 무하마드의 평화를 기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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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석 목사 (이란인교회)

영국 옥스포드에서 이란 복음화를 위한 위성방송국(Sat7Pars) 이사회를 하면서 잠시 쉬는 시간에 머리를 식힐 겸 우스운 농담들을 털어놓으며 같이 웃었다. 농담이라면 프랑스에서 오신 마크(Mark) 목사님이 단연 좌중의 배꼽을 쥐었다 놨다 할 정도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했다. 물론 그의 농담 속에는 풍자적인 것들도 있고 교훈적인 것들도 있었는데 이란에 관한 농담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었다.

제1탄: 이란의 대통령이 어느 날 이발소에 가서 이발사에게 자신의 머리를 깎을 때 앞이마의 가운데부터 정수리를 거쳐서 뒷목의 정중앙에 이르기까지 스님들처럼 넓게 배코를 쳐 달라고 하더란다. 물론 양쪽의 머리는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발사는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평생을 이발사로 지내면서 그런 머리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면서 죄송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깎는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내가 원하는 대로 깎아 달라”고 고집을 부리자 이발사는 할 수 없이 주문대로 깎아 주었다고 한다. 완성된 머리 모양은 매우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거울을 보고 흐믓한 미소를 짓는 대통령을 보고 이발사는 너무 이상해서 머리를 그렇게 깎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머리에도 ‘이’라는 곤충들이 살지 않는가? 그들도 암놈과 수놈이 있는데 그들을 같은 숲속에 섞어 놓으면 안 된다네”하더란다. (실제로 이란에는 이스파한이라는 도시에 여성들만 들어가는 공원이 있으며 테헤란에도 이런 공원을 건설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여성들만 걸을 수 있는 도로도 만들어야 한다고 국회의원들은 주장한다.)

제2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과 이란의 아하마디 네자드 대통령이 모두 죽어서 지옥에 갔다. 지옥에서 그들은 지상의 일들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지상으로 전화 통화를 하게 해 달라고 간수에게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간수는 돈을 얼마든지 준다는 약속을 받고 흔쾌히 수락을 하면서 먼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번호를 받아서 미국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약 10분간 통화를 하고 얼마냐고 물었다. 미화 10만 달러라고 청구서를 주었다. 화들짝 놀란 클린턴 대통령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은 대처 수상에게 전화번호를 받아서 영국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그녀도 역시 10분간 통화했는데 20만 파운드의 청구서가 나왔다. 왜 자기는 클린턴의 4배의 돈을 내야 하느냐며 항의했으나 결국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돈을 지불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란의 아하마디 네자드 대통령의 차례가 되어서 이란으로 연결시켜 주었더니 30분간 통화를 했는데 청구서를 보니 10달러 밖에 안 나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어찌 이런 불공평한 일이 있느냐며 항의했으나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두 분은 국제통화보다 더 비싼 우주 통화 요금을 적용한 것이지만 이란은 시외 통화요금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즉 이란을 지옥 내의 이웃 도시로 취급했다는 말이다.

제3탄: 미국의 목사님과 아프리카 성직자가 기도를 했다고 한다. 미국의 목사님은 성령을 충만하게 해주시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아프리카의 성직자는 돈을 많이 주셔서 부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단다. 그러자 미국 목사님이 어찌 성직자가 세상 사람들처럼 돈을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기도하는 법이라고…. 즉 자기는 지혜와 성령 등 신령한 것들은 넉넉한데 돈만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목사님이 성령과 지혜가 없다는 것을 간접 지적한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무슬림들이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할 경우에 이슬람의 교주인 무하마드의 이름이나 직책을 언급할 때는 항상 ‘PBUH’이라는 말을 삽입한다. 그 말은 ‘Peace Be Upon Him’의 머리글자만 딴 것으로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원하는 말이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것은 그에게 진정한 평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서 어떻게 써야 할 지를 고민하는 부자가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의 사정을 잘 안다고 말하는 이웃이나 친척이 그에게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했다면 그 부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무하마드가 늘 심령이 평안하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평화의 사도였다면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는 쓸데없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단테(Alighieri 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에 등장하는 무하마드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장 소름끼치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만일 무하마드가 지금 정말로 이러한 상황이라면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는 매우 적절한 인사가 될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원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평화를 이 땅에 주러 오신 분으로서 “평안(Peace)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14:2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조금만 열심 있는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을 의무로 알고 있다. 무슬림들은 과연 그가 지금 평안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알고 있다면 왜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일까?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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