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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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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부녀['샘물 같은 사람'중에서]

올해도 홍세표 전 외환은행장이 연하장을 보내왔다. 생활 태도가 바르고 유난히 우리말과 글을 사랑했던 그분의 따님을 담임했던 지가 그새 20여 년이나 지났는데도 옛정을 잊지 않는 것을 보고 홍 은행장의 대인관과 자상한 성품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분의 따님 홍소일 양은 인상에 남는 제자 가운데 하나다. 입학식을 마치자마자 담임 선생을 찾아와 국어 공부의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학생이었다. 그런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는 우리 반에서 9개월 다니다가 1979년 12월, 아버지가 뉴욕 지점으로 발령이 나면서 부모와 같이 미국으로 떠났다.

"...저는 요즘 한국에 대해 미국 사람들이 무시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것이 저를 무척 슬프게 해요. 선생님, 한국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꼭 전해주셔서 진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깨우쳐주세요. 나라를 올바로 사랑하는 학생들이라면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홍 양이 유학 중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와서 반 학생들에게 낭독해준 일이 있었다.


홍세표 은행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 곧장 한국은행에 공채로 입사해서 40여 년 간 전문 은행인으로 외길을 걸어왔다. 그분은 내게 한미은행장 재임 때 펴낸 <외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라는 에세이집도 보내왔다.

"인생의 여정을 하나의 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험준한 고개를 넘는 가파른 산길도 있겠고, 평탄한 대로도 있으리라. 이 길을 숨차게 달음질칠 수도 있겠고, 쉬엄쉬엄 유장하게 거북이 걸음으로 걸을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는 이 길이 나지막한 언덕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길을 오르면서 속도를 높인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변 경치를 만끽할 만한 여유나 곁눈질할 겨를도 없었다. 또 언덕길을 오른 도중에 갓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이 길을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덧 이순(耳順)을 넘겼다. 이 언덕길이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이 길만을 걷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저자는 머릿글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또 앞으로 걸어 갈 길도 분명히 밝혔다. 사회 진출을 앞둔 젊은이들이 새겨들으면 좋을 이야기였다.

홍 은행장은 무척 겸손한 분으로 나름대로 투철한 직업관을 가진 분이었다. "오르는 도중에 갓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고 했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꼭 그렇지도 않다. 이모부가 박정희 대통령으로 그분에게 무척 총애를 받았으므로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관계나 정계에 입문해서 일찍이 장관이나 국회의원 금 배지는 능히 달았을 분이다.

외환은행 프랑크프르트 지점에서 부장으로 있을 때 은행측에서 이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당신은 정중히 사양했다. 당신보다 먼저 입사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의 승진 기회를 차단해서 그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해서 안 되고, 그 때문에 여러 동료에게서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빨리 진급하려고 발버둥치는 삶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은 추한 삶이 될 뿐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한다면 때가 되어 진급도 하고 좋은 일도 생긴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리빨리' 병에 걸려 있다."

당신은 조급성을 경계하면서 나름대로 순리에 따르는 생활 철학을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며 살았다.

"만약 진급에 눈이 어두워 그 제의를 수락했다면 빨리 은행장은 되었을지라도 지금쯤은 아마 집에서 애나 보고 있을 것이다. 만일 3공화국 당시 권력의 비호를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지금까지 은행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권력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긴 하나, 그것을 지켰을 때 그 결과는 소중하다는 것을 예순이 넘어서야 터득했다."

홍 은행장은 이런 생활 철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박 대통령 사후에도 당신의 자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동안 수 차례 정권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순리에 따라 말단 은행원에서 마침내 은행장으로 승진했다. 특히 외환은행장 재임 때는 한국 금융기관 부채조정단장으로 구미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외자 유치를 원활히 해서 아이엠에프 체제하의 국난을 넘기는 데 숨은 공로를 세웠다. 외환 위기가 진정되자 후배를 위해 은행장에서 물러난 뒤 지금도 대기업 사외 이사로 일하며 대학 강단에서 경륜을 펼치고 있다.

요즘 우리는 무슨 게이트다 무슨 로비다 하는 권력형비리 사건에 날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살고 있다. 역대 정권의 이런 부패 게이트의 진원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개는 대통령 혈육이나 친인척, 동향인이 연루되어 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힘없는 백성들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왕조 시대인가 착각할 정도이다.

얼마 전 여행길에 논두렁에서 만난 한 농사꾼의 말이다.
"울타리로나 땔감으로 쓸 나무를 들보나 서까래로 쓰면 집이 기울어지거나 무너집니다. 내가 보기에는 면장감도 안 될, 자장면 집이나 하면 딱 맞을 사람을 자기 아들이라고 동생이라고 무슨 회장이네 의원이네 시키면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무지렁이로 보일지라도 부정 부패, 비리의 근원지만은 다 안다는 투였다.

어느 날 나는 홍 은행장에게 "왜 관계나 정계로 가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 말에 홍 은행장은 "저는 그런 재목이 못 되었어요."라고 정색을 했다.


"여러분, 전 이 순간이 너무나 슬퍼요. 어떤 친구는 제가 다시 미국으로 간다니까 부럽다고 했지만, 전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그 동안 여러분과 정이 들었고 내 나라 공부도 어렴풋이 익혀 가는데 또 떠나게 되어 정말 슬퍼요.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는 이를 악물고 공부할게요.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하세요."

이따금 이들 부녀가 떠오르면 홍 양이 학교를 떠나던 날 친구들에게 울먹이며 하던 이 인사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저는 그런 재목이 못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시던 홍 은행장의 표정이 떠오른다.


제 분수를 지키며 사는 사람과 본분에 충실하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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