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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한 형제를 주님께 보내며(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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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 특별한 형제가 있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 만만하고 그 자신 만만함이 오버(over)로 이어지기 일쑤인 형제였다. 동료 지체들은 항상 그 오버함을 핀잔 줬지만 아무도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오버를 즐기는 듯 했다.
난 형제가 구원의 확신이 있나 하는 의심을 항상 품었지만, 그는 사람을 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오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가 없으면 행사 끝난 뒷자리 처럼
별반 아무일 없이 쓸쓸히들 돌아가는 풍경이 그를 통해서 연출되는 주일 오후의 모습이었다.

그는 예수마을 이라는 문화 전도를 추구하는 교회내의 부서에서 활동했는데 이 팀은 여름마다 그 부서의 책임자이기도 한 내과 전문의 집사님을 모시고 외딴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곤 했다.
별로 친해질 기회가 없었는데 울릉도로 전도여행을 계획한 해에
포항에서 기상악화로 인하여 배가 뜨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만약이자 최악의 경우를 맞닥뜨렸다.
결국 팀은 포항의 어느읍에 위치한 교회를 소개받아 전도여행을 대신하게 되었다.
오버의 왕과 함께 있게 된 나의 교회 사역의 첫 전도여행이었다.

마지막 날 밤에,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나눔이 풍성하여진 때 느즈막한 시간에 형제가 내게 물었다.

"훈련받는다는게 있다는데 그게 뭐죠?"

그는 내게 예수전도단의 DTS(Disciple Training School) 예수제자 훈련학교를 물어왔다.
내가 그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교회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기쁜 마음에 소개하고 나누었지만, 형제는 자기의 몸이 안좋다는 이야기를 하며 머뭇거리더니 이내 옷깃을 올리고 교회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형제를 진료해주신 내과의 집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제가 위암 3기 말기라는 최종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배가 아프다 아프다 하기만 할뿐 아직 젊은데 무슨..
하면서 내시경도 하지 않고 단순한 복통이나 위염 정도인줄로 생각하고 약만 복용해 오다가 CT촬영등의 정밀 진단 결과가 청천벽락으로 나온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형제를 위해 기도하기로 한 그 주일 오후에 모두가 침통해 하는 중에도 형제는 혼자 웃고 있었다.

"아 뭐 그 정도 갖고들 그래요 에?"

그는 그때도 오버하고 있었다.
눈물로 주님앞에 있을 때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
요한복음 9장 3절이었다.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부모가 죄를 지은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누구 때문에 이사람이 이지경이 되었냐고 주님께 묻던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을 우리에게도 주셨다.

그리고 형제는 얼마후 수술을 하게 되었다.
서울 중앙병원(현 아산병원)에는 특실밖에 없었다.
소위 어르신들이나 들어가는 특실. 그러나 내일이 수술이고 그는 들어가야 했다. 하루에만 30만원이 넘는다는 그 병실.. 왜 주셨을까? 우린 곧 알게 되었다. 그가 만약에 좁은 1인실이나 2인실 이상에 있었다면 우린 수술 전날 그곳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형제를 담당하던 간호사가 내일 암수술 하는 사람의 병실이냐고 도리어 물어볼 정도로 우린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주신 약속의 말씀과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모아진 결과였다.
그는 수술하러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웃고 있었다. 끝까지 오버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장장 9시간의 대수술. 4시간 정도면 될것이라고 하셨는데
위 전체를 절개 해야만 하는 상황이 수술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식도와 장을 직접 연결하는 예상하지 않았던 수술까지 긴 시간이었지만 수술은 무사히 그리고 잘 끝났다.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는 형제의 큰 누님은 눈물이 말라 있었다.

그후로 2년 몇개월.
형제는 앞으로 길어봐야 6개월이라는 수술 담당의의 솔직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보다도 오래, 그리고 그 누구 보다도 더 오버하면서
잘 살았다. 여전히 사람들을 모으고 여행을 다니며 자장면을 먹으면서 "아 위가 없으니까 빠르지!" 그는 오버했다. 그 오버로 우린 정말 즐거웠다.

최근 6개월전부터 그는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간과 담(쓸개)사이의 길(담도)에 암이 들어선 것이다. 수술 당시 이미 온몸에 퍼져있던 암이 그동안 억제되어 오다가 그를 저 북경의 곰들처럼 복부에 호스를 꽂게 만들었다. 그래도 형제는 주눅 들지 않았다. 그후로 오랜동안 형제는 아팠다.
그리고 그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형제를 그리워 했지만,
사람들은 기도제목에서나 형제를 만나곤 했다.
오랜만에 나온 형제는 무척이나 쇠하여져 있었다.
그 좋던 몸은 반쪽이 되었고 얼굴에는 뼈의 윤곽이 심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또 오랜 시간 형제를 보지 못하고..
형제가 최근에 교회에 나타났을때는 사람들이 그 모습에 흠칫 놀라 먼저 말을 건네기가 어색한 지경까지 되었다.
이제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집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형제를 찾아간 날.
앉아있기 조차 어려운 형제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물었다.
너의 그 오버에 감추어져 있던 구원의 확신은 어디있느냐고..
형제는 그제서야 언제나 부라리듯 노려보던 그 눈을 내려놓은 채 내게 말했다.
수술할때 이미 모든걸 포기했었다. 난 덤으로 살았다. 그리고 정말 내안의 혼란이었던 그 문제에 대해 이젠 말할수 있다.
난 주님곁으로 갑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함께 전도여행을 가던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싶다고 우리 모두를 초청했던 이유는 놀랍게도 함께 찬양하며 예배하기 원한다는 것이었다. 당구와 카드게임으로 우릴 초대했던 형제가 함께 예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장소가 그의 집에서 병원으로 바뀌었다.
응급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응급실에서 옮겨졌고 그리고 이번에도 특실이었다.

아산병원으로 바뀐 중앙병원은 형제가 수술할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고 크게 찬양하지 못하도록 주의가 주어졌지만,
그날처럼 우린 예배했다. 이젠 형제가 우릴 초대한 예배였다.
그렇게 뺀질거리던 오버의 왕이 초청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형제는 한 노래도 따라하지 못했다. 산소호흡기가 형제를 얽혀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중의 그 누구 보다 전심으로 예배한 자는 형제였다.

그리고 오늘 난 형제의 입관예배를 참석하고 왔다.
밝고 환한 형제의 얼굴이 하얀 국화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주님곁으로 갔다는 연락이 왔을때 수술전에 주셨던 약속의 말씀이
기억나면서 난 주님과 잠간의 혼란스런 시간을 가졌다.

그럼 뭐죠?..
주님은 내게 계속 같은 말씀만 하셨다.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할 것이다!

요한복음 9장은 소경이 눈을뜨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맺어진다. 난 형제에게서 이일을 기대했었다. 그의 2년 이상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의 생각은 나와는 다르셨다.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뢰한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다.
그와 대면하여 나누었던 그의 마음의 고백이 날 위로한다.

교회사역을 시작한 해와 형제를 알게 되고 형제의 아픔과 함께
한 시간이 같다.. 형제를 떠나 보내며 아직 이립의 초반에 있는 나를 되돌아 본다.
형제는 나를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동생이었지만 친구 였던 그..
곧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난 형제를 무척 그리워 할 것이다..

정렬
이번 여름은 주님과 보내
주님 앞에선 맘껏 오버해

이민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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