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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읽어보시고 평가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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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요기도회에서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르게 교인들의 반응이 썰렁하네요. 인사를 하러 문 앞에 서 있는데 평소에는 웃으며 인사하시던 분들도 고개를 돌리고, 굳은 얼굴로 나가시던데.........그래서 지금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설교를 잘못했나 싶은 마음도 들고, 내용에 문제가 있나 싶은 마음도 들고....그래서 여러분의 진심 어린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설교 전문이 좀 길지만 끝까지 읽어보시고 평가해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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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28일 수요일 수요예배 설교

제 목 :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본 문 : 사도행전 5장 1절부터 11절까지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죠. 국민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그동안 폐암으로 끈질긴 투병생활을 했지만 어제 27일 오후 3시15분께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숨졌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주일씨 흉내를 많이 냈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고인과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고인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지난 1980년대 이주일씨의 코미디가 전국을 휩쓸 뿐 아니라 북한에도 알려지기 시작할 때, 김정일씨의 큰 아들인 김정남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재미가 있으니까 "저 사람 이주일 데려다 줘"라고 했답니다. 그 소식이 이주일씨에게도 들어갔겠죠. 그래서 한동안 이주일씨가 납치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는군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코미디 하면 이주일, 이주일하면 코미디를 떠올리는 것처럼 무슨 일하면 어떤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바로 하나님을 속인 사람들로 유명하죠.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2장에 와서는 정말 성령께서 오순절이 이르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임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3장에 와서는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이 일어나죠, 4장에 와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법정에 붙들려가 위협을 당하고 4장 마지막에 와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 4장 마지막을 보면 36절, 3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후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은혜를 너무나 받은 나머지 자신의 재신을 팔아 가지고 몽땅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바나바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사도 바울과 함께 사도행전 13장에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재산을 팔아 함께 생활을 하며 은혜를 누리자 이것을 지켜 보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신들의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은혜를 가져다 주기는커녕 죽음을 불러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스럽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이길 원했기 때문에 마음에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조잡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것으로는 이 사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몇가지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는데, 그 핵심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해보실까요?

-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산다.
- 하나님을 믿지만 자신이 여전히 주인인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경을 볼까요.
제가 아까 4장을 보면서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을 짧게 말씀드렸죠. 4장 36절을 다시 보면 바나바는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이미 여러 모양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단 한 마디가 나오죠.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 즉 권위자라고 인정했다, 그렇게 나옵니다. 사도들이 그를 인정할 정도면 그 사람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삶의 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바나바라고 하는 요셉은 바로 레위족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레위족은 구약에서 가나안 정착 과정을 통해 땅을 분배할 때 그 대상에서 제외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족속들이 십일조를 레위족에게 배분하여 오직 그 십일조만을 통해 생활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레위족인 바나바가 땅을 갖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시대에는 율법을 완전히 배제하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나바라고 불리우는 요셉은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신실한 삶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이 땅을 갖고 있는 것이 바르지 않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결단을 내리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 밭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저마다 바나바의 신앙에 대해서 훌륭하다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느 족속인지, 어떤 가정의 출신인지 전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의 모습을 보고선 자신들도 그런 멋진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입니다.
차라리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음부터 재산의 일부만 팔아서 그 일부만 헌금했더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텐데 그들의 경솔한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신앙의 결단을 내리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괜시리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신중히 기도해 보지도 않은채 신앙적인 결단을 내렸다가 큰 낭패를 보고 나중에는 교회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어떤 분은 동생이 큰 병에 걸렸습니다. 동생의 병을 고치려고 소위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 분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아서 동생이 병에 걸렸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 분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소중한 동생이 자신 때문에 병에 걸렸다니. 그래서 이 분이 멀쩡히 잘 운영하던 기업을 정리하고 아내와 모든 가족의 만류를 뿌리친채 신학교를 가기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죽고 말았습니다.
이미 신학교를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 분은 끝내 신학교를 갔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의 실수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불해야 할 고통은 결코 간단히 끝나지 않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괜히 부흥회에 갔다가 말도 안되는 작정 헌금을 하고는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 교회에서는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계시했다고 하면서 자식의 등록금을 내러 가다가 그냥 교회에 와서 헌금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시거나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깡패가 아니십니다. 조직폭력배도 아니십니다. 무슨 고리대금업자로 오해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상황을 보시고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과 시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시는 분이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시거나 수렁으로 밀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매사에 무엇을 하든지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해결되며 어려움이 닥쳐 오는 것 같지만 기쁨이 오며 뜻밖의 상황이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찾아옵니다.
누가 보기에도 하나님의 뜻인 것 같고 누가 생각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같다고 해서 성급히 결정하지 마십시오. 성공이나 승리가 아닌 절망과 실패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니, 왜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느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느니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도 그런 우리를 바라보면서 속이 터지실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죠. "내가 언제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 너의 마음대로 해놓고서 왜 이제와서 나한테 원망이냐"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결코 경솔하게 결정하지 않습니다.

둘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혹시나 여러분들 중에 교회에 헌금을 하기 위해 집을 팔고서 헌금하신 분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다른 용도로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장사를 통해 수입이 발생했을 때 큰 액수의 헌금을 할 수는 있지만 오직 헌금을 하기 위해 재산을 처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굉장한 열정과 헌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습니다. 사실 헌금을 하기 위해 재산을 처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볼 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그 순간 만큼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보통 부흥회나 어떤 경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을 받으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고백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헌금만을 위하여 재산을 팔 수 있었겠습니까?
어느 정도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있었겠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막상 재산을 팔고서 헌금을 하려고 보니까 돈이 아까왔습니다. 그동안 그 돈을 모으기 위해 피땀 흘려 고생한 걸 생각하니까 모두다 바친다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산을 판 금액을 알고 있는 사람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헌금액 중 일부만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금 중대한 착각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이 누구의 것인가 그 소유주에 대한 착각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5장 4절을 보겠습니다.

-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그 땅이 너의 땅이라면서, 그걸 네 마음대로 못하느냐" 사실 이것은 베드로가 역설적으로 한 말인데 이 말의 진짜 뜻은 이렇습니다.
"야, 아나니아야. 너는 그 땅을 팔기 전이나 판 후에나 너의 땅인 줄 착각하지 마라. 그 땅은 너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인데 지금 너는 누굴 속이려고 하는 것이냐? 바로 하나님이 아니더냐?"

제가 청년으로 있을 때 어떤 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아니, 하나님께서 열을 주시면서 그 십분의 일만 바치고 나머지 아홉은 마음대로 쓰라는데 그 하나를 못바칩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의 소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소유 중 십분의 일만 의무적으로, 마치 세금을 내듯이 하나님께 드린 후에 나머지는 여러분 마음대로, 쓰고 싶은대로 쓰고, 사고 싶은대로 사고,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크게 착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은 전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드리는 예물입니다. 전부를 드리면 우리가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상징적으로 십분의 일을 드리고서는 나머지 아홉도 내 마음대로 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쓰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적당히 십일조를 내고서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런 자세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도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속인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무서운 결과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면 이 중에 하나님께 떳떳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물을 필요로 하실 때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고 우리의 마음을 앞세우고 우리의 상황을 앞세우면서 적당히 우리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적당히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척하며 드리는 척하며 순종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대로 행동하면 우리는 그때마다 독약을 마시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영적으로 자살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육적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으며 겉으로는 누가 봐도 신실한 신앙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속은 이미 썩은 냄새로 진동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방독면을 쓰고서 우리를 측은히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더 크게 쓰임을 받지 못하는가, 왜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는가 의문을 갖기 전에,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믿고 섬기고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결정이 아닌 나를 기쁘게 하는 결정만 내리고서 어찌 하나님의 축복과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교묘한 부분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속을 다 내어놓고서 땅을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해독약을 마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마시고 있는 독약이 온 몸에 퍼져서 끝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영적인 죽음을 맛볼 것입니다.

저는 사실 오늘 설교를 하면서 마음에 부담이 많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 제게는 오늘의 설교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전도사로서 하는 마지막 예배 설교입니다.
제가 내일 준목 인허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며칠간 내일 받게 되는 준목 인허를 떠올리면서 제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했습니다.
제가 1996년부터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했는데, 올해로 7년째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섬기고 고백했는가, 진지하게 뒤돌아 봤습니다. 어떤 날은 지나온 제 삶의 순간들이 너무나 한심하고 후회되어서 밤이 늦도록 의자에 앉아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제 고집을 앞세웠고 제 영광을 구했으며 경솔한 판단과 행동으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많이 입혔는지 모릅니다.
그런 허물 많고 어리석은 제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교회를 이끌고 가는 지도자의 자리, 목사 안수를 위한 바로 전단계인 준목 인허를 받게 된다니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설교는 제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그렇게나 주위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경솔한 행동과 판단,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직전의 상황까지 갔으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 고집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했던 제 어리석은 과거를 바라보며 이젠 그런 시행착오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싶지 않은 간절한 바램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바라지도 않은채 이미 여러분 마음 속에 계획한대로, 이미 여러분의 생각에 좋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성공과 승리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 속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혹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숨어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결단과 신앙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나바로 사도 바울로 베드로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저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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