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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믿으면 된다는데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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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이 다 되어 가는 어느 해, 나의 인생에 대해 나 스스로 책임져야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그 결단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신앙을 버리는 것이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받은--누구의 강요가 아닌 나 스스로 받은 것이었지만-- 행동제약을 거부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 다니며 신앙교육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런데도 나의 삶을 살펴볼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의 평안의 없었으며 오히려 가중된 죄의식--이것을 어느 학자는 비대된 양심이라고 했다--으로 인해 더욱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주일날 하루라도 교회가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학창시절, 주일날에 학교공부라도 하면 큰 벌을 받을 것 같아 토요일 밤에 공부하다가 자정이 되면 책을 덮었으며 주일은 초저녁에 한숨 자고 자정에 일어나 공부를 하곤 했다. 공부 시작 전엔 꼭 성경을 한 절이라도 읽고 시작해야만 했었다. 내 기억에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주일날 교회출석하지 않은 날이 사흘이 있었다. 그 사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미안하고 죄스러워 새벽에 냉수로 목욕까지 하고 새벽기도에 나가 사죄 드렸었다. 학생회 회장직도 맡았으며 학생회 예배는 물론 대예배까지 거의 빠지지 않았고 종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었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도 모범적인(?) 생활을 했었고 많은 칭찬을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심지어 나의 이 모범적인(?)생활에 감동을 받아 교회 나가게된 친구까지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엔 평안 이 없었으며 늘 ‘믿으면 된다는데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어냐?’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었다.

  대학시절부터는 그 굴레, 속박에서 벗어나 보려고 다소 반항도 해보았다. 또 정신의학을 공부하면서 그 갈등을 해결해 보려했으나, 그 정신의학적인 이론이 조금 도움이 되는듯 하더니 또 다른 무거운 짐이 되었었다. 지금도 그 당시 정말 살고 바로 믿어보려고 했던 나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노력은 한마디로 피나는 노력이었고 이런 나에게 구원이 없다면 하나님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습은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믿지도 안 믿지도 못하는 이 생활을 버리고 기독교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나도 인간답게(?) 남은 인생을 한번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도 그냥 물러서기는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께 딱 한번 기회를 드리기로 했다. “하나님 알아서 하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습니다. 이제 전적으로 당신께 맡깁니다. 전에도 이외 비슷한 시도는 해봤지만 이번은 진짜입니다. 기한은 일년금년 말까지입니다.”

  그해 봄 우연스럽게 친구의 제안으로 부부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성경공부란 그 친구 부부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각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느낀 소감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첫 주엔 마태복음을 다 읽고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약속한날 아침에 보니 아직 두 장 밖에 못 읽었다. 첫 시간인데 싶어 약속을 지킬 욕심으로 틈틈 히 읽기는 했지만 잘 읽히질 않았다. 저녁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직 다 읽지 못해 한 줄 한 줄 읽지 않고 한 단락씩 급하게 읽어나가는데 이 순간 나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은 큰 사건이 일어났다.  성경전체가"-이렇게 해라, 그러면 이렇게 되리라." 아니면, "--네가 이렇게 되기 원하느냐?, 그러면 --이렇게 하여라." 라는 말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믿으면 된다는데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그 의문이 풀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늘 날 사랑하고 계셨고 내가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그렇게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는 분이었다. 그 동안 난 그의 손바닥 손금 위에서 바 둥 거리며 반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재미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도 고민만 하고 있지 않고 예수 님 과 의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병이 나면 바로 의사를 찾지는 않는다. 먼저 자기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다 해봐도 안되거나,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자기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때야 비로소 의사에게 찾아간다. 특별한 경우 환자가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을 때(응급환자)는 의사가 직접 병을 치료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면 의사는 환자에게 병을 설명해주고 또 낫게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며 환자 자신이 해야하는 역할을 지시한다. 그 이유는 지금 이 병이 낫게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다시 그 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또 다시 병에  걸려도 스스로 그 병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자가 사는 방식은 병에 걸리기 쉬울 뿐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환경 또한 병에 걸리기 쉬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때 의사의 말을 듣고 듣지 않는 것은 환자 자신의 결단이요 선택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구원이 나에게 필요하고 좋아보여서, 나의 반 평생을 나의 힘으로, 나의 열심으로, 내가 노력하였으나 그 애쓴 결론은  나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원은 그냥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예, 하나님, 알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평생 그 은혜 감사해 주님 <말씀 잘듣고> 주님을 기쁘시도록 살아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것 또한 저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오니 늘 함께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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