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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창조적인 사랑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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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변화가 정지된 상태이며, 변화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생명현상이고 창조다.
현대를 급변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어떤 생물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노
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환경의 변화되는 정도나 속도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힘과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생활의 편리함이나 여러 다른 요인들로
인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그 변화를 두려워하며
외면하려 하고 자신의 무력함만 생각하여 우울해 하고 있는 것
같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잘 대처하지 못하거나 힘
들 때 정신질환이 생기게 되며, 또 이 병 자체가 변화에 효과
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정신병은 환경의 변화가 너무 컸거나 힘든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된 경우 환자지신이 온 힘을 다하여 현실에 적응하려다 실
패한 경우 발병한다. 그래서 이 병이 생긴 후부터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적응 노력을 중단하게 된다.

  정신병의 증세는 환자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외부의 변화를
모두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잘못 인식하여 그 위협에 대해 스
스로 방어하려는 노력이지만 밖에서 볼 때는 이해하기 힘든 미
친 행동으로 나타난다. 즉 자산의 불안을 해결하려는 방법이
정신병적(비현실적)방법이기 때문에 남들을 불안하게 만들며
스스로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대인관계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
다.

  반면에 노이로제 환자들은 환경의 변화를 잘 인식하며 그에
적응하기 위해 무척 노력하긴 하나 효과적으로 적응하지 못하
여 괴로워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무척 애쓰지
만 옆에서 보면 옛 모습 그대로며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을 더
욱 악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애쓰는 방법 자
체가 노이로제 방법이기 때문이다.

  노이로제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즉시 그 잘못을 인정
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면 되는 간단한 상황에서 말이 많고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상대가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며 스스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더욱 힘들게 되지만 같이 사는 사람까지 피곤하게 만든다. 죽
음은 변화가 정지된 상태이며 변화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
거이며 생명현상이고 창조다. 어른은 아이가 커진 것이 아니며
개구리도 모양이 달라진 올챙이가 아니듯이 변화란 단순히 모
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창조되
는 것이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만난 후 모양이 달라진 (거
라사)의 광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하신 일을 증거 하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막5:15,20)

  정신질환의 치유는 그 환자의 인격변화를 의미한다. 이 인격
의 변화는 그와 치료자의 인격이 서로 '만남'으로 일어나게 되
며 옛 것이 아닌 새로운 인격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
자와 환자가 서로 가까이 있다고 이 '창조적인 만남'이 성립되
는 것은 아니며 치료자의 사랑과 환자의 믿음이 있어야만 치유
가 가능하다.

  부모 자식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자식들이 '부모의 하
는 말'을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고 바르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만남에서 '자식들에게 느껴진 사랑'이 자식들
의 인격을 성숙시키게 된다.

  현대생활은 우리들의 만남 자체를 힘들게 하며 또 만난다 해
도 각자의 막연한 두려움(불안)이 서로 사랑하기 힘들게 만든
다. 심지어 옆자리에 앉아 같은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도 성
도들끼리 기쁨을 같이 나누기 힘든 것은 서로 인격적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의 만남을 어렵게 하며 서
로 사랑하기 힘들게 하는가? 우리 모두 같은 노이로제 환자(?)
이기에 사람들 앞에서는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
에' 혹은 '타고난 성격이 원래 그래서' 등등 변명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하늘 아래 사는 우리 인간들이 하늘에 계셔서 우
리의 생활 전체를 살피고 계시고 우리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변명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성도들의 만남을 방관하시지 않고 언
제나 그들의 만남 가운데 '사랑'으로 나타나셔서 창조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자
만이 '창조적인 사랑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성도들의 만남을 방관하시지 않고
언제나 그들의 만남 가운데 '사랑'으로 나타나셔서 창조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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