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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금도 눈 감으면 보이는 그 곳...(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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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교무실에서의 갈등이었다. 남자 교사들의 참으로 그 이유를 알기 어려운 우월감과 교감, 교장 선생님의 남녀차별은 정말 참아주기 어려웠다. 여교사는 아무리 경력이 쌓이고 유능해도 핵심적인 일은 맡기지 않았다.

남교사가 지난밤에 과음을 해서 다음날 결근을 하거나 지각을 하면 <그럴 수 있지...>하면서, 여교사가 집안에 급한 일이 생기거나 아이가 아파서 결근을 하거나 지각을 하면 <이래서 여자들은 안 돼...>하며 욕을 했다. 심지어는 연세 제법 드신 여교사가 아침에 출근해서 교감선생님께 어른에 대한 예의로 커피를 타 드리면, 거기 자기도 당연하다는 듯이 끼어서 커피 한 잔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젊은 남교사들도 있었다.

더 웃긴 것은 임신한 여교사가 출산휴가를 들어가려고 신청을 할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라에서 법으로 출산휴가를 주고, 그 기간 동안 기간제 교사를 쓰는 것도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일인데, 마치 자기 사업장에서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며 얄밉게 휴가를 가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회식자리였다. 무슨 술집에나 온 듯이 젊은 여교사를 자기 옆에 앉혀놓고 술을 따라줄 것을 요구하거나 노래를 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2차, 3차까지 함께 갈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학교에 대한 충성인 것 마냥 정당화시키고 미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술이 덜 깬 얼굴로 출근을 해서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았었다.

남교사들이 수업이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으나 여교사들이 그 시간에 뜨개질을 하거나 잡지를 읽는 것은 그냥 두고 보지를 못했다. 무책임하고 무성의하며 비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선배교사들 중에는 초임교사들에게 일은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구박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교육청으로 보내야 하는 공문서를 기안하는 일이나 내부결재를 위한 문서를 작성하는 일, 교무실의 각종 문서나 서류를 작성하는 일은 대학 4년을 다닐 때는 물론 교육실습을 나갔을 때도 배운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다닐 때 뭐 했길래 이런 것도 모르느냐?...>며 다그치기만 했지, 일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그 답답함...(-.-)...

남녀차별은 교무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도 남교사와 여교사를 차별했다. 남교사의 수업시간에는 착하고 얌전하던 아이들도 여교사의 수업시간이 되면 태도가 돌변했다. 아니 남교사의 수업시간에 받은 스트레스를 여교사에게 푸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곳에서 적응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치마정장을 입고 출근해야만 하는 줄로 알았었다. 그래서 줄기차게 치마정장을 입고 다녔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의 쓰라린 경험 이후에는 치마 입기가 꺼려졌다. 아이들은 여교사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려고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복도에서 슬라이딩을 하여 들여다보는 녀석, 자전거에 달린 볼록거울을 떼 내어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수시로 비추어보는 녀석, 아예 몇 명이 작정을 하고 한 놈이 교과서나 문제집을 들고 와서 질문을 하는 동안 나머지 패거리들이 열심히 들여다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들은 그래도 귀엽기라도 했지만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더 끔찍했다. 신체의 일부분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녀석, 느끼하고 몽롱한 눈으로 줄기차게 쳐다보는 녀석,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주 노골적으로 엉뚱한 질문만 해대는 녀석......참 별종들이 많았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옷차림이 점점 간편해졌고, 말투가 터프해졌으며, 안 그래도 씩씩한 내 성격이 더욱 남성화되어 갔다....(-.-)....

그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에다 그림을 그려 놓고 뛰어다니며 노는 놀이도 하고, 족구를 배워 헤딩도 가끔 해 가며 놀았으며 배구도 하고 놀았다. 축구공으로 제기차기까지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여름이면 늦은 밤에 아이들과 함께 강에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현장에서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마늘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깻잎이랑 파를 넣고, 즉석에서 배를 따고 손질한 물고기를 넣은 후, 라면을 넣어 먹는 그 매운탕 맛은 지금도 혀끝에 느껴질 정도다.

방과 후에는 내 자취방으로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돌아가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하는데 도시락을 이미 다 먹어버린 아이들이 대여섯 명씩 단체로 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잘 먹었다. 아니 엄청나게 먹었다. 한 번은 고 3 짜리 두 녀석이 찾아왔는데 6인용 전기밥솥에 가득한 밥을 두 명이 다 먹어치우고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집에 있던 라면 세 개를 찾아내서 끓여주었더니 그것도 다 먹고는 또 먹을 걸 찾았다. 냉장고에 있는 것을 다 꺼내먹고는 디저트로 커피까지 한 사발(!) 마시고 일어나면서 자기들끼리 하는 말 <야, 배고픈데 집에 밥 먹으러 가자...>

한 번은 교문 앞에서 아이들에게 붙들려 중국집으로 끌려들어갔다. 뭐 애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으랴 싶어서 기분 좋게 따라 들어간 나는 중국집에서 나올 때 빈털터리가 되었다. 아이들의 기본은 <짜장곱배기 + 짬뽕곱배기>였다. 그것이 기본일 줄 나는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ㅠ.ㅠ...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더욱 바빴다. 교회의 일이 없으면 아이들과 가까운 달기약수탕이나 주왕산에 올랐다. 도시락을 싸들고 우리끼리 가는 소풍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그 길은 모퉁이의 돌 하나까지도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렇게 친구처럼 열심히 같이 놀다가 수업시간엔 <교사>와 <학생>이 되니 아이들도 예전처럼 나를 대하지는 않았다. 애 먹이는 아이들이 거의 사라졌고, 수업시간이 좀 수다스러워지긴 했어도(남자들 수다는 여자보다 더하다...) 재미는 넘쳐났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들이 내게 자신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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