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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금도 눈 감으면 보이는 그 곳...(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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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관광지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궁벽한 시골도 아닌 그 동네는 그래서인지 도시는 아니면서 시골다운 순수함이나 인정은 별로 없는 어설픈 시골이었다. 주왕산 국립공원도 있고 달기 약수탕도 있어서 단체 관광객은 끊이지 않았지만, 그 단체 관광객들은 당일 코스로 다녀갈 뿐이어서 그 동네의 발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녀가는 관광객들은 관광지에서 긴장이 풀려서인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동네에는 깨어진 가정이 제법 되었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가슴 아프게 살아가는 집들도 꽤 많았다. 이웃 동네 학교에선 집 나간 엄마를 찾아 나선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생겼었다. 그렇게 집을 나가 버린 엄마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 가정은 대체로 아빠들이 술이나 도박 중독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가정의 엄마들은 무책임한 가장을 대신하여 경제활동을 하면서 때때로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견디지 못하여 가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정의 엄마들이 가출하기도 했다......

그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내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여자인 것이, 그것도 어린 처녀인 것이 참으로 한탄스러웠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리고 아저씨였다면 진짜 아이들의 형님처럼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일이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아이들을 향한 나의 진심은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해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는 나와 불과 두 살 밖에 나이 차이가 안 나는 늙은 학생도 한 명 있었는데, 나는 그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스물두 살이나 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그 학생은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고만고만한 열일곱 살짜리들 틈에 다 자란 청년이 하나 끼어 있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학생은 봄에 나에게 편지를 한 장 보냈었는데 거기에는 정말 내가 뒤로 자빠지고도 남을 내용이 적혀있었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오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눈앞이 노오래졌다가 웃음도 나왔다가.....그러다가 그 학생의 진지한 눈빛이 생각나서 나는 참 괴로웠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오년을 기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오년을 기다릴 수 없다...>

학생이 아닌 교사의 신분으로 맞이했던 첫 번째 여름방학은 내가 남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평소에도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건 기껏해야 동네 문구점에서 철없는 중학생이 저지르는 좀도둑질이나 고등학생들의 자질구레한 싸움들이었다. 그러나 그 여름방학 때는 폭행치사사건이 터졌다. 비상소집 되어 학교로 출근한 우리 교사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 사건을 저지른 학생은 평소 말이 없고 성실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학생은 고3이었다. 한창 대학입시 준비로 바빠야 할 그 아이 인생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억울하게도 그 학생은 사람을 죽일 만큼 독하지도 않았고, 죽일 마음을 품고 때린 것도 아니었으며, 많이 때리지도 않았었다. 딱 한 대였다. 딱 한 대를 때린 곳이 하필이면 급소여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도시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가 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했는데, 자기도 시골출신이면서 시골에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교만을 떨었다는 것이 그 폭행의 이유였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어도 그 학생은 실형을 살았다. 다만 정상참작이 되어 1년 6개월로 형이 감해졌을 뿐......학교에서는 1년 6개월을 기다려 그 학생을 다시 고3 으로 받아주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방학 때마다 일어났다. 그 해 겨울이었다. 방학하던 날 해맑은 미소로 나에게 인사했던 고1 짜리 두 녀석이 개학을 불과 이틀 앞두고 먼저 갔다. 한 대의 오토바이에 사이좋게 타고 가던 두 아이는 마주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가 버렸다. 방학하던 날 웃으며 했던 인사가 내겐 그들이 남긴 유언이 되었다. <샘요~, 개학하면 보시데이~>......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맑은 눈동자, 그 얼굴 가득했던 미소......나는 그 아이들에게 일대일로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했었다. 그 아이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은 내게 물으실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사랑이 부족하여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 마음에는 변명거리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변명일 뿐 진짜 이유는 사랑 없음, 그것 한 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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