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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제사장의 길> <예언자의 길> 그 갈등의 기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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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길>  <예언자의 길>  그 갈등의 기로에서

성서의 기록은 크게 보아서 두 개의 전승(傳承)에 뿌리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전승(祭司長傳承)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전승(預言者傳承)입니다. 신구약성경은 이 제사장전승과 예언자전승이 충돌하는 긴장된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사장과 예언자는 그 직분이 서로 달랐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은혜를 구하는 직분이고(히브리서 5:1∼3), 예언자는 하나님의 엄위한 공의(公義)의 음성을 백성들에게 대언(代言)하는 직분입니다(예레미야 1:9,10).

제사장전승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전수(傳授)한 율법에 기초합니다. 오직 모세와 그 형 아론이 속했던 레위지파만이 제사장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구별된 예복을 입고 구별된 대접을 받으면서 오래 동안 세습적 지위를 확보해 옴으로써 이스라엘의 엘리트 그룹으로 등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왕정(王政)이 자리잡고 제사장제도가 확립되어가자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왕의 권력과 야합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귀족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양(羊)의 무리를 돌보아야 하는 자리가 오히려 양을 억압하는 자리로 변질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자리가 도리어 권력 앞에 아부하는 자리로 타락한 것입니다.

이 타락한 제사장의 무리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공의와 회개를 촉구한 것이 바로 광야의 예언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이 귀족의 지위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동안, 예언자들은 소외되고 배척받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대부분이 거짓 선지자들이었던 궁정예언자(宮廷豫言者)왕의 측근에서 장래의 신비한 일들을(豫告)하는 자 들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아무런 자격 없이 홀로 세상에 나온 저 '광야의 예언자' (預言者)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은 왕과 제사장들의 부정의(不正義)를 엄중하게 질책하기 일쑤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러했고 이사야 아모스가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왕과 제사장들은 회개를 거부하고, 오히려 불의를 꾸짖는 예언자를 향하여 "교만하다"느니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느니 비난하면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가장 미워했던 대상이 바로 광야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계급의 윤리적 파탄과 그 속에 숨겨진 부끄러움의 일들, 그 가식(假飾)과 위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참 대제사장임을 선언합니다(히브리서 7 : 11∼28). 그러나 정작 예수 자신은 제사장전승을 따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가문인 레위의 후손이 아니라 유다의 후손입니다. 처음부터 아예 제사장의 신분적(身分的)자격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광야예언자의 전승'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 나아가 악령의 유혹과 싸웠고, 회당에서의 첫 설교를 예언자 이사야의 글로 시작했으며(누가복음 4:16∼20), 자신의 모든 삶의 궤적을 구약의 예언들과 직결시켰습니다(마태복음 21:4). 더 나아가, 십자가 위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예언의 완성을 선포하기조차 했습니다(요한복음 19:30).

  예수님은 제사를 집례한 적도, 제물을 받은 적도, 또 제사장의 예복을 입은 적도 전혀 없습니다. 사제의 예복이란, 역사상 가장 멋진 넌 센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내 주제넘은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사랑으로 넉넉히 용납했지만, 오직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書記官)의 무리만은 크게 꾸짖었습니다(마태복음 21:15,16, 23:1∼39). 마땅히 회개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회개의 권면을 배척하고, 공의의 목소리에 도리어 이를 갈며 대적하는 영적 교만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율법사(律法士)의 차이에 대해 좀 알아보았는데, 이 둘은 모두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전문가들이었지만, 율법사 lawyer는 일상생활 속에서 율법의 사법적(司法的) 기능을 담당하는 '세속적 직책'이었던 데 반하여, 서기관 scribe은 성전과 회당에서 율법의 신앙적 측면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종교적 직책'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의 무리와 함께 질책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유를 넉넉히 알겠습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야훼 하나님의 언약 궤를 메고 회중의 맨 앞에 서서 행진하게 되어 있습니다(여호수아 3:6). 이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백성들 앞에서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됩니다. 언제나 말과 행실이 일치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최선두(最先頭)에 서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대부분이 이 거룩한 임무를 저버리고, 입술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서 그 삶의 실상은 깊이 부패되어, 가난한 백성들이 드린 제물로 섬김과 대접을 즐기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유태의 제사장들뿐만이 아닙니다. 그 이후의 모든 세대에 걸쳐 수많은 제사장적 직분들이 꼭 같은 죄악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중세의 교황들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 사람 앞에 언약한 일들을 헌신짝처럼 내어 던지고, 현란한 말장난과 위선적인 기교(技巧)의 몸짓으로 백성들의 눈을 속이며, 의식(儀式)과 권위를 앞세운 종교적 상징조작(象徵操作)으로 스스로의 안일을 도모하는 삯군 목자(요한복음 10:12)로 전락한 것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깊이 탄식합니다. "양을 돌보지 않고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양의 젖이나 짜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지어 입으며 살찐 양을 잡아먹으면서도, 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는구나...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는구나."(에스겔 34 : 2∼8, 공동번역). 제사장전승과 예언자전승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매우 긴장된 대목입니다.

삶의 모범이 없는 제사장, 말과 행실이 다르고 인격적 신뢰를 잃어버린 제사장, 회개를 거부하고 공의를 외면하는 제사장... 그는 이미 제사장이 아닙니다. 참 제사장은 예수님처럼 스스로가 양 무리를 위한 제물이 되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모범과 섬김의 직분입니다. 카톨릭의 촉망받는 사제였던 말틴루터는 그 화려한 사제복과 제사장의 자격을 흔연히 벗어 던지고, 아무 자격도 없는 예언자전승을 따라 종교개혁의 그 좁고 험한 길을 걸었습니다. 제사장전승에서 예언자전승으로... 이것이 저 위대한 '평신도신앙'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루터가 발견한 개혁신앙은 카톨릭과 같은 제사장종교도, 유태교와 같은 성전종교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 험한 예언자의 전승을 따르는 광야의 신앙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도 제사장의 길과 예언자의 길은 곳곳에서 갈등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베드로전서 2:9)들인 크리스챤들은 오늘 과연 어느 토대 위에 서 있습니까... 제사장전승입니까, 예언자전승입니까? 성전에 가득한 축복의 기원입니까, 아니면 광야에 외치는 공의의 목소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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