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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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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 지휘자가 노래를 잘 못한다는 말들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나는 솔리스트가 아니라 지휘자이며, 합창 사운드를 만드는 일에는 나름대로 정리된 사고가 있기 때문에 노래 못하는 것을 흠으로 여기지 않으려 애써 자위해왔으나 정작 우리 대원이 아닌 분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행여 지휘자의 존재가 성가대에 흠이나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단지 음악이 너무 좋아 음악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며 살 것 같아 영문과를 다니던 중 새롭게 음악대학 진학을 꿈꾸었습니다. 차마 고향의 부모님께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혼자서 대입 학력고사를 다시 치루며 작곡과 입시를 준비합니다. 화성학 책을 보면서 작곡을 공부하고, 음대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음악대학 연습실에서 시창과 청음 그리고 피아노를 연습하였습니다.

그러나 작곡과 입시를 위한 모든 과목을 혼자 힘으로 준비하기에는 너무도 벅찼습니다.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실기시험이 한달 앞으로 다가 왔을 때 무작정 고향에서 부쳐온 하숙비 십만원을 손에 들고 작곡을 가르쳐 주실 선생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으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수년간은 해야 할 작곡 공부를 한달 동안 정말 열심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영문과의 수업과 시험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하루 하루 다가오는 입시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고마우신 하숙집 아주머니는 하숙비를 한달간 늦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공짜 밥을 먹고 있다는 괜한 자격지심에 세끼 모두를 하숙집에서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침 식사 후 일찍 집을 나서 하루 종일 도서관과 음악관을 맴돌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공부 중에 허기가 지면 대학 구내 식당에서 400원하는 국밥 한 그릇을 꽉 채워 받아 그것으로 점심, 저녁을 겸하여 때웠습니다. 한달 동안 참 많이 주렸지만 그러나 배고픔 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가을 학기로 접어 들면서는 영문과 수업에는 더 이상 참석치 못하였고, 기말시험은 응시 조차 못하여 낙제생이 될 것은 너무도 명확하였습니다. 준비 중인 작곡과 입시 또한 결코 만만찮은 관문이었습니다. 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피아노 실기를 위하여는 레슨을 받아야 했으나 저에게는 그럴만한 돈이 없어 그저 혼자 힘으로 연습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외 작곡실기나 화성학과 같은 과목도 선생님의 열성적인 지도는 있었지만 한달 동안 모든 것을 따라 가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도 벅찼습니다.

준비 없이 치룬 학력고사 성적 역시 영문과에 입학할 때와 비교하면 너무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다른 수험생들과 비교할 때 경쟁력이 있는 것이라고는 고교 내신 성적밖에 없었습니다. 입학시험은 전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패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부모님 모르게 벌인 이 상황이 열 아홉 어린 나이로서는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큰 고통이었습니다.

주변 어디를 살펴봐도 의지할 곳은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가슴을 짓눌러 오는 걱정과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성가대원으로, 수요 예배 반주자로 섬기고 있던 대학교회의 예배실을 저녁마다 찾아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합격하게 된다면 평생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참 보잘 것 없는 믿음이었으나 낙심 중에도 기도하였고 그때 마다 주님은 나에게 참된 위로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1986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의 막바지 어느 날! 대학 정문 광장 게시판의 합격자 명단 한 구석에 있는 저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막상 합격은 했으나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귀향을 미루고 있던 어느 날! 곧바로 집으로 내려 오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온통 F학점으로 채워진 영문과 성적표를 펼쳐 보이시며 무슨 일이 있어 이런 성적을 받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니 아버지께서는 침묵하셨고 놀란 표정의 어머니께서는 음악 공부는 그 동안 한 것으로 충분하니 작곡과는 포기하고 계속하여 영문과에 다니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아버지는 제가 원한 바 대로의 음악대학 입학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시는 말씀이 입학금은 주겠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에  이미 1년의 대학공부를 시켰으니 음대를 다닐 동안은 3년치 만의 학비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영문학도에서 음대생으로 변신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밤늦게 까지 음악관을 지키며 열심히 공부하였고 4년 동안 계속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창 생활 중에 음악 선교단의 일원으로서 각 교회로, 학교로, 교도소로 때로는 시골 마을 다리 위에서도 열심히 찬양하며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수요일 마다 대학교회의 반주자로 5년을 하루같이 섬겼으며,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정문 광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노방 전도 찬양을 하였습니다. 3학년 때부터는 학생성가대의 지휘자로 섬기기 시작하였고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지휘자입니다. 모자라는 것이 어디 성악 실력뿐이겠습니까? 신앙도, 인품도, 음악적 지식도 얕은 냇물처럼 밑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함량 미달의 지휘자일 뿐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애써 보지만 곧 한계에 부딪치며 쉽게 낙담하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지휘자로 매 주일 대원들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요.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근래에 두 분 권사님께서 선물과 교훈의 말씀이 담긴 귀한 편지를 주셨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두 분이 의논이라도 하신 것처럼 같은 내용의 말씀을 주셔서 저는 이것이 저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여기며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위로와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섬기며, 찬양하는 삶”에 대한 권면이었습니다.

허물 뿐인 지휘자이나 주님이 세워 주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기쁨으로 찬양하며 살아가렵니다.

이 험한 세상 나 살아 갈 동안
내 주님 가신 길 걸으며 내 주님을 찬양해
십자가 보혈 날 구한 그 사랑
나 매일 찬송을 드려도 늘 부족한 것 뿐이니
나 호흡 있는 동안에 나 생명 있는 동안에
나 주를 찬양하리라 내게 생명 주신 주님께

                                <성안교회 시온성가대회보 22호, 지휘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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