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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하리수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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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아동부 주일 아침 예배를 마치고 성경공부 시간때 있었던 일입니다.
3.4학년 담임 선생님이 집안사정 때문에 나오시질 않아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남자 녀석이 하리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그래서 하리수가 남자일까 여자일까라는 조금은 어리숙한 질문을 던졌더니
남자라는 아이도 있었고 여자라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상식의 범위안에서 하리수는 불쌍한 사람, 즉 환자라 설명했더니 한 녀석이 대뜸 자기는 하리수가 부럽다 했습니다.

난데없는 아이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하리수는 돈을 많이 벌잖아요"하는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관점에서 하리수가 왕성한 사회적 활동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화려한면이 좋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아이의 말 한마디속에 물질 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표현의 방식과 전달의 차이가 다를뿐이지 어쩌면 죄성을 지닌 인간의 내면속에 움크리고 있는 욕망은 별반 차이가 없다 여겨집니다.

그 아이에게 하리수는 불쌍한 사람이며 경제적 이익에 눈이먼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대표적 경우라 설명하며 결코 동경의 대상이 아님을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천민 자본주의가 활개치기에 결과를 지나치게 중시합니다.

오죽하면 어린 아이의 눈에 비추인 경제 관념속에서도 과정이나 동기는 생략한체 결과만 중시하는 세태가 투영되어 있을까요?
하리수가 부럽다는 아이의 대답은 저로 하여금 교회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좋은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될때에는 그것은 틀린것이라 말해줄 수 있는 교육을 행해야 되겠다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일생이 믿음의 선한 싸움임을 알려줍니다.
그 싸움은 일회적이 아니기에 때로는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앞에 서는 그날까지 선한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라고 이르시오."(디모데전서 6:19,새번역성경)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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