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새로본 성가대의 추억

첨부 1


          
대학원 재학 중에 군대를 갔으니 남들 보다 늦은 편이었습니다. 주위에서 많은 걱정을 하였고 제 자신도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해야 하는 것에 큰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입대를 앞둔 토요일 고향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후 지휘자로 섬기고 있던 대구의 성도교회에서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 새벽 입영열차를 탔습니다.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전 신체검사를 하는 입소부대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몇 일 동안 신체검사를 받는 중 입소대 교회의 저녁예배에 참석을 하였고 예배의 반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체검사를 마친 후 육군 제2훈련소(보통 논산훈련소라고 알고 있지요) 제 28교육연대에 배치 받아 고된 훈련병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주일, “교회에 갈 훈련병 집합”이라는 구령에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허겁지겁 준비하여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훈련소 교회(연무대 군인교회)는 계룡대 본부교회가 건립되기 전만해도 본당의 규모가 2,500석 이상 되는 동양 최대 규모의 군인 교회였습니다. 매 주일 수 천명의 훈련병들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배에 참여할 성가대원을 모집한다는 군종병의 광고를 듣고 성가대 연습실로 갔습니다. 훈련소 교회의 성가대는 이미 조직된 성가대가 아니라 매주일 예배에 참석한 훈련병 중 100여명을 모집하여 30분 정도 연습하고 찬양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동안 봉사하던 지휘자는 수개월 전에 전역을 하였고 매주 훈련병 중에 지휘할 자를 찾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입소대 교회에서 함께 예배했던 동기들이 저를 추천하여 엉겁결에 지휘를 하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512장을 찬양했는데 3절 가사 중 “숨 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 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저를 비롯한 모든 훈련병 성가대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몇 칠 후 어느 날 저녁, 성가대장을 맡고 계시던 소령 한 분이 저를 찾아와 면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지휘자를 정하기 위하여 기간병과 훈련병 등을 대상으로 찾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저를 적임자로 의논했다며 훈련을 마친 후에 논산훈련소에 남아 근무하면서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씀이 신학생이 아니므로 군종병은 될 수 없고 훈련소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주일만 교회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주간 생각하고 답을 해주기로 하고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훈련병 생활을 통하여 이 곳 조교들의 생활이 매우 힘이 들어 보였고 또한 제 자신이 조교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자신이 없어 쉽게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하여 고된 훈련을 받으며 기도하는 중에 얻은 응답은 비록 이곳에서의 군 생활이 쉽지는 않겠으나 하나님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있음에 감사함으로 섬겨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훈련을 마친 후 주중에는 훈련소의 조교로 주일은 연무대 군인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성가대를 좀 더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주 교체되는 훈련병 대원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마침 장교 및 하사관들과 그의 가족들과 기간병들이 성가대에 동참하게 되어 10여명의 고정 멤버가 확보되었습니다. 그리고 훈련병들도 6주간의 훈련일정에 맞추어 한 번 선발되면 6주 동안 지속적으로 성가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들이 좀더 일찍 교회에 도착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갔습니다.
이 모든 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분이 성가대장 조집사님이었습니다. 이 분은 저 같은 이등병은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소령 계급이었지만 성가대 일에서 만큼은 저를 지휘자로 깍듯이 섬겨 주었습니다. 이 즈음에 성가대의 이름이 집사님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바로 “새로본 성가대”였습니다.

“새로본”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체가 새롭게 되었다는 것과 훈련병들이 주축이 되는 성가대이므로 매주 새로운 얼굴들이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대장 집사님은 지금은 전역하여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불혹의 나이에 교회의 전도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저와 아름다운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로본 성가대의 지휘자로 섬기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조교 생활은 육체적으로 고달팠고 주일날 교회에 갈 때면 선임병들의 말 못할 간섭과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배려가 있음에도 중대의 쫄병으로 해야 될 많은 일들이 있는데 주일은 오전과 저녁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야 하니 믿지 않는 고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고난 중에도 매 주일 저 보다 더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는 훈련병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찬양할 때 주님은 참으로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연무대에 3년여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치면 모두 자대 배치를 받아 떠나야 하는 훈련병들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겼고 그들 또한 아름다운 영혼의 찬양을 들려주고 떠나갔습니다.

94년도에 교직에 첫 발을 딛고 동의대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어느날 한 학생이 식탁에서 저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혹시 훈련소 교회 지휘자가 아니었냐고 놀라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훈련병일 때 성가대에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 때 저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다며 지금은 성안교회 대학부에 다니고 있다고 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의 조교 생활 후에 연대 정훈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좀더 여유 있는 군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 마다 6월 25일이면 오산리 기도원에서 민, 관, 군 연합 집회가 있습니다. 육해공군 전 기독 장병들이 참여하는 큰 집회인데 훈련소 교회 지휘자라는 이름 때문에 250명 연합성가대의 지휘를 하는 영광도 입었습니다. 전역을 앞두고는 주위의 배려로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여 현역군인의 신분으로 합격하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3년여 군 생활 동안에 하늘로부터 받은 은혜는 다 기록할 수 가 없습니다. 다만 군 입대를 걱정하고 있던 저에게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읽어 주신 성경 말씀이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담담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7-9)                             
                                    

          <성안교회 시온성가대회보 지휘자 칼럼 中>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