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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하나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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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물  
   ▲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 또는 분노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눈물'은 보통 슬픈 감정을 나타내는 생리현상의 하나로 여깁니다. 물론 어떤 때는 더 할 수 없이 기쁜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실은 이 때에도 그 기쁨 이전에 이미 맺혀있던 서러움이나 고통이 극적인 기쁨으로 전환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슬픔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수십년간 서로 헤어져 살던 남북이산가족이 만나는 순간, 누구나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이 때의 눈물은 만남의 기쁨 자체보다는 이제까지 남모르게 억눌러왔던 이별의 슬픔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순간 한꺼번에 분출되는 데서 오는 서러움의 눈물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할 때, 예레미야의 슬픔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요시아왕의 영적 갱신운동에도 불구하고 온 이스라엘이 죄와 불의로 깊이 타락해 있던 기원전 625년,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그 후 40년 동안 때로는 마르지 않는 눈물로, 때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이스라엘 앞에 회개와 공의를 외쳤으나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위정자들과 종교적 권위를 누리고 있던 제사장들은 그를 모질게 핍박했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야 했고, 애굽으로 망명을 해야 할 만큼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이 예레미야가 흘린 눈물의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슬픔과 서러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자신의 눈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곧 하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크게 울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누가복음 19:41,42).
  화려하게 치솟은 헤롯의 성전, 유태 땅 곳곳에 자리잡은 회당들, 엄숙한 예복을 입고 토라와 미쉬나를 강론하는 종교가들, 이 종교성으로 충만한 도성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찬송이 아니라 오히려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울음 끝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셨습니다.

  ▲ 그보다 6백여년 전, 예레미야는 야훼 하나님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서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부르짖었습니다(예레미야 7:4). 이것은 당장 돌에 맞아죽을 신성모독의 범죄행위였습니다. 이 신성모독을 통해서 그는 참된 신성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눈물이 숨어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눈물이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예레미야 9:3∼5).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은 그들의 거짓을 바라보는 눈물이었습니다. 거짓이야말로 모든 죄악에 공통된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죄의 뿌리가 탐욕이요 이기심이라면, 그 표현방식은 거짓입니다. 탐욕과 거짓은 죄악의 쌍생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꾸찢었습니다(요한복음 8:44).

  ▲ 하나님은 오늘 이 땅을 향해, 우리의 삶과 믿음을 향해 기뻐하실지, 아니면 예레미야처럼, 그리스도처럼 눈물을 흘리실지?
  지금 이 나라 이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수많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지 이미 오래고, 경제계도 분식회계와 이중장부 그리고 거품경제로 크나큰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사회 각 부문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아침에 하는 말과 저녁에 하는 말이 다릅니다. 우리 사회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불신사회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거센 불신의 물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신앙계의 거짓이 세속사회의 거짓에 못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찢길 대로 찢긴 분열상 속에서도 교단들의 이름은 모두가 '통합'이요 '합동'입니다. 갈라질대로 갈라진 오늘의 개신교에 정말 통합과 합동이 있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개혁신앙의 이름에 걸맞는 인격의 쇄신과 삶의 개혁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부끄러운 신앙으로 온유와 겸손을 외치며, 기름진 입술로 가난한 자의 복을 전파합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넘치도록 많으나 산상수훈의 모범된 삶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요시야왕이 죽은 후 얼마 안되어 유다는 마침내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도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 24:2). 화려했던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그 폐허 위에 다시 돌 하나도 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와 예수님이 흘린 눈물의 결과였습니다. 아니,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흘리신 눈물의 끝이었습니다.

  오늘 이 땅의 신앙계를 향하여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물은 과연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지, 밀려오는 두려움에 차마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눈물어린 예레미야의 음성이 천둥처럼 가슴을 쳐올 뿐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예레미야 24:7).

                                                             200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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