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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신앙으로 변장한 오늘의 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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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상들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면서 거기에 다른 것을 섞어서 섬기는' 혼합신앙(混合信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과 맘몬(mammon)을 겸하여 섬기는 오류에 대한 예수님의 우려처럼(누가복음 16:13), 하나님 신앙에다가 다른 것을 섞어서 섬기는 혼합신앙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라는 데에 이설(異說)이 없는 듯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출애굽기 32:8).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형상화(形象化)한 셈인데,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2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아무 것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을 범하는 파계(破戒)에 해당합니다. '모든 형상들의 본질적 근원'인 하나님은 '형상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자면, 암송아지는 부요(富饒)한 농경문화를 나타내는 애굽의 상징물입니다(예레미야 46:20). 소는 농경문화의 필수적인 도구요 암컷은 생산의 모태(母胎)이며 어린 송아지는 성장의 상징이므로, 거기에다 금을 입힌 금송아지는 풍요와 번영과 문화와 성장을 나타내는 '우상의 최종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야훼 하나님을 이처럼 애굽의 상징물인 금송아지로 다시금 형상화했다는 출애굽기의 기록은, 저들이 하나님께 대한 거역(拒逆)의 의도를 드러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듬지 않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마태복음 7:21,22)이 곧 우상숭배라고 단정해서 좋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곳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상숭배도 저 불신자(不信者)들이 아니라 먼저 신자들과 교회들 안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초등학교 교정에 서있는 단군 상(像)이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챤들의 삶 속에, 이 땅의 교회들 안에 버티고 서 있는 우상이 더 시급한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의 사도 루터는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면 사탄도 그 옆에 자기 소굴을 판다"고...사탄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역은 세속(世俗)의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은 어차피 악령 앞에 무릎꿇고 있습니다. 악령이 노리는 곳은 바로 교회와 신자들의 영혼입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이단(異端)과 적(敵)그리스도들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정설(定說)입니다.

통일교와 신앙촌을 이단으로 단죄(斷罪)했던 정통교단의 입장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그 통일교의 교주가 불신자였습니까? 아닙니다. 유능하다는 목사였습니다. 신앙촌의 설립자가 원래부터 교주(敎主)였습니까? 웬 걸요, 큰 영험이 있다는 장로였습니다. 그 안의 수많은 신도들이 처음부터 그들 교주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까? 천만 에요. 그들 대부분이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었으며, 누구보다도 바른 신앙생활을 하노라 자부했던 열심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통일교와 신앙촌을 쫓아내 버린 지금의 한국교회 안에 다른 우상의 요소들은 전혀 없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슬프게도, 나의 눈은 무수한 우상의 싹들이 오늘의 신앙 속에 다투듯 자라나고 있음을 확연히 봅니다. 나 혼자만의 착시(錯視)도 분명코 아닙니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인 바알은 그 당시 가장 발달한 문화단계였던 농경문화의 남신(男神)이고, 그 짝인 아세라 목상(木像)은 대지(大地)에 곧게 박힌 말뚝으로서 성장과 풍요의 여신(女神)입니다. 농경의 도구, 생산의 모태, 풍요의 기원, 문화의 표현, 성장의 상징인 애굽의 금송아지가 가나안에 와서 바알과 아세라로 변신했을 뿐입니다.

이들 모두가 인구를 늘리고 노동력을 증대시켜 경제적 소득을 증가하며 풍요로운 문화적 삶을 향유하려는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을 투사(投射)한 것들입니다. 오늘날의 말로 고친다면 '경제제일주의'나 '강성대국(强盛大國)또는 '문화입국(文化立國) 같은 지표들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겠습니다. 우상이 어차피 인류와 그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原初的) 욕망을 충족하려는 본성적인 종교성과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보다 끝없는 경제적 성장, 풍요로운 문화의 혜택을 더 목마르게 구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바알 신앙이요 아세라 숭배입니다. 경제와 문화를 경시(輕視)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 보다 궁극적인 것이며, 무엇이 더 우선적인 것인가를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나라와 사회를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의 신앙 안에, 이 땅의 교회들 안에 넘쳐나는 성장물신주의(成長物神主義)의 명백한 우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성장학은 넘치도록 많은데, 교회성숙학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 성장이 선택과목이라면 내적 성숙은 필수과목이요 전공과목이어야 합니다. 100억원 짜리 교회당, 10층 짜리 교육관이 복이며 은총입니까? 통일교의 건물들은 그보다 훨씬 더 큽니다. 신앙촌의 예배당은 한꺼번에 수천 명을 수용할 만큼 넓었습니다. 헤롯의 성전은 비교할 수 없이 화려했고, 면죄부(免罪符)를 판 돈으로 지은 성 베드로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웅장한 예술품중의 하나입니다. 절제 없는 외적 성장이 내적 성숙과 반비례(反比例)의 사선(斜線)을 그려온 것은 거의 예외 없는 역사의 법칙에 속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성장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성장을 위해 굳이 따로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아이를 억지로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심각한 왜소병(矮小病)에 걸린 아이가 아닌 한, 성장촉진제를 주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아이를 죽이는 일입니다. 성장촉진제가 아니라, 살과 피와 뼈를 만드는 음식을 먹이고 병이 나면 양약(良藥)을 복용시켜 먼저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장은 그 뒤에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어패류(魚佩流) 양식업자들이 투하자본(投下資本)을 성급히 회수할 목적으로 성장촉진제를 과도히 남용해 온 탓에 국민건강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패류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마치 건강상태가 지극히 불량한 아이에게 음식이나 양약은 먹이지 않은 채 성장촉진제만 마구 주사하는 격입니다. 아이의 몸은 안으로 썩어가고 있는데, 성장촉진제를 맞아 부풀려진 겉모습만 보고 즐거워하는 한심한 모습이라니...

소유나 재정이나 큰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자기 치장과 자기 확장만을 꿈꾸고 있을 것입니까? 재물이 많아지면 욕심이 생기고, 건물이 커지면 싸움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만고의 진리요, 오늘 우리 눈으로 분명히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차라리 있는 것도 팔아서 가난하고 주린 이들을 돕는 것이 보다 옳은 일이겠습니다. 비록 비좁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어떤 신앙인격들이 자라고 있는지, 그들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과연 건강하고 건전한지를 분별하는 정밀진단이 훨씬 더 시급한 일입니다. 인격으로 신뢰를 줄 수 없으면, 겉모습에 더 집착하게 되는 법입니다. 18K로 겉만 살짝 도금한 가짜 금반지가 진짜 황금반지보다 더 번쩍거리는 것과 이치 상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금송아지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우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갈라디아서 1:10),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사람이 취하는 일(사도행전 12:23)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을 우상화'하는 오류들 말입니다.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은 개신교가 카톨릭의 가장 큰 잘못으로 지적하는 교설(敎說)입니다. 오류 투성이의 인간인 교황을 완전존재인 신의 위치로 높여 우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카톨릭은 겨우 교황 한 사람에게만 무오설을 적용했을 뿐, 차마 모든 사제들이, 모든 본당신부(本堂神父)들이 언제나 다 옳다고 강변할 만큼 뻔뻔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는 어떻습니까? 사실상 개개의 교회들마다, 개개의 목회자들마다 제각기 자신의 무오설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목회의 자리를 둘러싼 갖가지 추문들이 이처럼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소위 카톨릭을 개혁하고 나왔다는 개신교의 모습이라니,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차디찬 토르소 torso처럼 교회당 벽면에 걸어둔 채, 언제나 내 머리 내 생각으로 공동체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는 욕심이야말로 '자기무오설(自己無誤說)에 다름 아니며, 교황무오설보다 더 심각한 '자기우상화'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소외된 자,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섬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섬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이들이 도리어 섬김 받고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져서, 웬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면 쉽게 삐치고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냉큼 토라져 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이들이 거꾸로 보살핌을 베풀어야 할 사람을 극진히 돌보는 어처구니없는 전도(顚倒) 현상이 벌어지기 일쑤여서, 토라지면 더 큰 아파트로 어르고 발끈하면 더 좋은 승용차로 달래가며, 행여 '편가르기'식의 돌출행동으로 잔잔한 공동체를 온통  들쑤셔 놓지 않을까 눈치보기에 바쁜 나머지, 급기야는 부자간의 무슨 세습이라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상이 벌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 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믿음 안에, 이 땅의 교회들 안에 저 물신(物神)의 우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사람의 우상들을 마냥 세워놓은 채로 이 한 해를 또 그대로 넘겨야 하는 것만큼 기막힌 슬픔도, 달리 없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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