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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변의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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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변의 은사”
필자의 교회에서 영성훈련을 하는데 어느 여 집사가 방언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들으니 두 가지의 뜻이 담겨져 읽혀져 왔다. 하나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음란의 영아 물러가라고 영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조용히 그 여 집사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를 미워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데 자신이 옛날에 술집에 나갔노라고 고백하면서 요즈음 꿈에 자꾸 유혹하는 이상한 꿈을 꾼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방언하는데 지나가다 들으니 “내가 못살아, 내가 못살아” 하였다. 나중에 그 사연을 물어보니 자기 남편이 자기는 원치 않는 이사를 가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는 아홉 가지의 은사가 있는데 그 중에 통변의 은사가 있다. 방언을 하면 누군가 통변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4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예배의 형식이 나오는데 예언과 방언 그리고 통변이 집회 중에 자연스럽게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영적인 은사의 대가임을 알수 있는데 그의 서신 가운데 은사의 세계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언과 통변의 세계를 언급하여 오늘날도 그런 은사가 나타나고 사용되는데 중요한 성경적인 근거를 주었다. 바울은 (고전 14:10)에서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라고 말하였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쉽게 이해하면 모든 새소리가 뜻이 있듯이 방언도 그 뜻이 있다는 것이다.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은 혼과 육의 깊은 것을 통달한다. 따라서 방언 속에는 인간 무의식의 세계가 담겨져 있기도 하고,  영의 기도와 하나님께 올리는 호소가 담겨져 있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예언적인 말씀이 담겨져 있기도 한다. 한 마디로 기도의 영적인 사닥다리인 것이다. 그래서 통변은 예언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이웃의 어느 교회에서 통변 세미나를 한다고 가봤더니 강사가 어떤 사모였는데 사람들마다 시범을 보이는 그 통변이 천편일률적으로 기도하는 식의 내용이었다.  나중에 그 분이 필자의 사모를 통변해주더니  통변이 기도가 아니라 예언이 나온다고 하면서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둥 거렸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용감한 초보였던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필자에게 묻기를 자기가 통변을 받아봤는데 자기가 한 방언보다 통변자의 통변이 더 길게 나오는데 그것이 그럴 수 있습니까 하였다.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방언은 뜻의 언어이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은 몇 마디를 하였지만 그 통변은 훨씬 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둥소리를 듣고 그것을 통변하시었다.[요 12:28-29] 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하였다. 오늘날 은사가 교회에서는 사장되어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은사는 귀한 것이다. 잘 사용하면 참으로 유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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