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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등골 이야기 6 - 자화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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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밤, 아내는 서울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개 친한 친구와는 한두 시간이 넘도록 수다를 떨고도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고 하는 것이 여자(?)라고 하던데, 통화를 하는 아내의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습니다.

  "그래…네가 마음 고생이 심하겠구나…집에는 잘 들어오고…그래…그렇다고 네가 친정에 내려와 있으면 어떡해? 그래도 네가 네 자리를 지켜야지. 네 남편 자존심 쎄잖아. 말은 안해도 네 남편 너한테 미안해서 죽고 싶을거다. 얼른 올라가서 손이라도 잡아줘라."

  아내의 친구 남편은 지방대 출신으로는 드물게 모 대기업체에서 삼십대 중반에 부장이 되어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십이 갓 넘어 명예퇴직을 한 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밖으로 나돌더니 얼마 전부터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문득 며칠 전 만난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체의  어엿한 사장이었는다는 그는 회사가 부도 난 이후,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얼마되지 않은 돈을 그에게 쥐어 주고 돌아섰지만, 그의 흐느끼는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사실 한순간의 성공과 실패, 있음과 없음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뛰어난 용모, 넉넉한 재물, 높은 지위, 알아주는 학벌 역시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우리 사는 라인 경비아저씨에게 어떻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물었는데, 그 분은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소싯적엔 날렸지라우. 인물 좋다 풍채 좋다는 말 퍽도 들었지라우. 근디 살다본께 금세 요로케 늙어붑디다…세월 그거 참 빨라라우…삼십년 넘게 관료 밥 묵고 살았는디…은퇴 허고 나서 집에 있응게 배만 나오고…못 살겄습디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지라우. 첨에는 낯 부끄럽기도 허고…쉽지 않았지라우…체면이 밥 먹여주고 건강 주는 것도 아닌디…근디 그 놈의 체면 헌신짝 버려불디키 버려불고 난께 그렇게 홀가분헙디다…아, 지금은 이 일도 없어서 못허는 사람이 쌔부렀지라우……요새는 아파트 주민들 얼굴도 알고 긍께 한 식구맹키 참 좋아라우. 한 가지 아쉰 것이 있다믄 일요일에 교회 가야 쓴디 내 맘대로 못 쉰게 그것이 겁나 아쉽지라우…."

  그 후, 나는 백발이 희끗희끗 내비치는 이마를 쓸어 넘기며 하회탈처럼 웃어보이는 경비아저씨를 볼 때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담아가는 한 폭의 어여쁜 자화상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어제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있는데, 희상이가 도화지에 뭔가를 자꾸 그렸다 지웠다 하는 것을 보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희상이, 뭐하니?"
  "선생님이 월요일 날 올 때 자기 얼굴 그려오라고 했는디 잘 못 그리겄어요."
  "으음, 희상이는 희상이의 특징이 뭐라고 생각해?"
  "…"
  "희상이는 별명이 짱구잖아. 그러니까 앞뒤꼭지 툭 튀어나오게 그리면 되지…."

  아내는 도화지에 앞뒤 툭 튀어나온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면서 계속 말했습니다.

  "희상아, 얼굴을 너무 자세히 그릴 필요는 없어. 예를 들면 얼굴에 난 점이나 솜털은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대개 어릴수록 세밀하고 작은 부분에 매달리지만, 어른이 될수록 전체적인 부분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된단다.
  산다는 것은 삶의 주변에 널려 있는 가는 선들을 하나씩 지워내는 것과도 같아서 결국엔 하나의 굵은 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내는 일과도 같은 거야…."

  희상이는 알 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으며 짱구 동그라미 안에 동그란 눈과 세모 코 그리고 배를 닮은 입을 차례로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래 이렇게 적었습니다.
  '김희상. 하나님의 아들, 아빠 아들, 엄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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