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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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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를 빙자한 사치와 낭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가 '접대문화'다.
아마도 이것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절의 풍습이 잘못 발전된 것일 것이다.
이제 이만큼 먹고 살게 되었으면, 그런 풍습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그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들어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퇴폐 행위는 바로 이 접대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대부분의 거래는 이 접대 행위와 함께 일어난다.
거래 하나를 따 내기 위해서 하루 저녁에 수백만원을 유흥비에 뿌린다.

오죽하면 '술상무'라는 직함이 생겼겠는가?
가장 고급의 접대를 풀코스(full course)로 제공해야 거래를 딸 수 있다.
제공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러다 보니, 온갖 호화 향락 업소와 퇴폐 업소가 호황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대 문화는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다.
물론, 교회에서 누구를 접대하기 위해서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호화연을 벌이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교회도 역시 손님을 최고로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그 생각은 옳다. 교회에 어떤 손님이 오든지 최고로 대접하려는 생각은 옳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의 대접'에 대한 개념 정리가 세속 사회의 개념과 똑 같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속의 개념으로 볼 때, '최고의 대접'이란 가장 값비싼 대접이다.
교회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사에 대한 대접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 지역에서 가장 맛이 좋다는 집으로 가서, 가장 값비싼 음식을 주문하여 대접한다.
그렇게 해야 가장 좋은 대접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눈물겹게 드린 헌금은
아무런 뜻없이 강사의 배를 채우는데 소비되고 만다.
강사에 대한 최고의 대접이라는 허울로써 교회는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다.
이러는 사이에 교회의 중직들은 강사 접대 자리에 따라 다니며
즐기는 식도락에 재미를 붙인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이러한 접대 행위를 즐겼다.
강연을 초청한 교회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1시간쯤 일찍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한다.
그래서 가 보면, 어김없이 그 지역에서 가장 좋다는 음식점으로 간다.
내 돈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해 볼 비싼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받았다.
처음에는 '원래 그러는 것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반복하여 이러한 대접을 받으면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찬다.
특히, 부흥집회에 가면, 하루 세 끼를 종류를 달리해 가면서 대접을 하는데,
'내가 먹으러 왔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게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합석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결국, 한 끼의 식사로 적지 않은 돈이 낭비되어 버린다.
그러는 동안 강사는 어느 사이에 맛있고 기름진 음식에 물들어 간다.

일 년에 꽤 많이 교회 강연이나 집회에 초청을 받아 다녀야 하는 나는,
'이러다가는 나를 버리고 말겠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진리를 전해 주려는 영적 갈망이
감미로운 음식에 대한 갈망에 의해서 압도될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기름진 영적 음식에 대한 열망이 산해진미에 대한 열망에 의해서
압도될 것 같았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영적 갈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맛없는 음식을 즐겨 먹도록 권고하였다.
그분의 후예라는 내가 이렇게 맛에 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저녁 초청을 정중히 사양한다.
다른 핑게를 대고, 강연 시간에 맞추어 간다.
가는 도중에 적당한 곳에 들어가 설렁탕 같은 것 하나를 사 먹고 들어간다.
집회 초청을 받을 때에는
'모든 식사를 내 숙소 근처에서 나 혼자 해결하겠다'는 것을 약속받고 간다.
하루 세 끼의 식사를 위해서 소비하는 그 많은 돈과 시간이 아깝고,
그러한 식탐(食貪)이 나의 영적 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심의 와중에,
나는 교회가 하루 빨리 접대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강사로 초청받는 사람은 교회 식당에서 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교인들은 식당에서 국에 밥을 말아 먹는 동안,
고급 식당에 나가 별미를 먹는 것은 목사의 자세에 어긋난다.
특별한 대접을 거절하고, 기꺼이 소홀한 음식으로 만족해야 한다.
아니면, 혼자 해결하고 가든지.

교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인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기준에 의하면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강사료를 많이 주는 것이 최고의 대접일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기준은 달라야 한다.
그것을 최고의 대접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신앙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속의 기준을 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영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는 교인들이
음식과 돈으로 최고의 대접을 하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 접대문화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소홀한 접대에 대하여 섭섭해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흥강사는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하도록 구체적으로 요청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숙소는 그 지역의 최고급 호텔의 최고급 방, 음식도 최고급,
각종 다과도 최고급으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만일에 그런 강사가 있다면, 초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천사같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교회의 삶 속에 이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얼마나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놀라울뿐이다.
우리는 별 생각없이 그렇게 행하고 있는데,
알고보면 우리가 말하는 것과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인지 모른다.

그런 모순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날카롭게 스스로를 분석하고,
용기있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한 행동은 분명히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남들 다 받는 대접인데, 눈 감고 주는 대로 먹는다고 비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기득권을 그대로 쥐고 있는 동안,
우리의 사랑하는 교회는 부패되어 간다.
나의 기득권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우리 교회가 더 중요한가?


글쓴이/ 김영봉 목사/ 협성대학교 교수/ <사귐의 기도> 저자


아굴라의 기도;
주님, 우리 한국교회에 이처럼 깨어 있는 귀한 목사님을 세워주셔서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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