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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머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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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님 하면 생각 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어머님의 남자 손보다도 투박하고 거친 손이고 또 하나는 길고 긴 밤 기도이다. 가난하고 없는 집으로 시집오셔서 오 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기 위해 막노동 공사판과 같은 어떠한 허드레 일도 마다하시지 않으시라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이 갈라지신 어머님의 손을 볼 때마다 철이든 후 저것이 전부 우리들 때문이라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 진다.

어머님은 충북 미원에서 태어나시었고 온양온천에서 자라셨다. 외할아버지가 사업(내가 알기로는 나막신 장사 , 구슬공장...등)을 하셔서 살림의 기복이 많았던 것 같다. 어머님은 천안에서 유명한 중학교에 다니셨으나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잘 안되고 외할머니까지 돌아 가셔서 졸업을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사업이 망하고 살림 형편도 안 좋은 가운데서 온양온천에서 역사가 깊고 중견 교회인 온양제일교회를 외할아버지가 집에서 시작할 정도로 신앙심 깊은 외할아버지가 새어머니를 얻었을 때 어머님의 배신감과 외로움은 가장 안 좋은 시절에 아무 미련 없이 시집오게 했고 유일한 피붙이인 고등학생 외삼촌이 사과 나무상자에 이불을 등에 지고 어머님은 시집을 오셨다.

그러나 아버지 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었다. 고조 할아버지가 조선 말기 때 통정대부(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일정도로 세도를 누리셨고 할아버지까지도 발에 흙 안 뭍이고 나귀만 타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왜놈하고 땅 문제로 소송을 하면서 집안이 기울었고 아버지 형제분들도 안 좋은 상태에서 돌아 가셨다.

아버지는 가진 것 하나 없이 어머님하고 결혼하신 것이고 없는 사람 둘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우리 오남매 (사실은 육남매, 내 위에 누나가 있었는데 영양실조로 죽었단다.)를 부양했어야만 했다. 나도 임신했을 때 어머니께서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신다고 했는데 내가 태어난 지 사흘만에 할아버지께서 출생신고를 하시고 그해에 돌아가셨다. 매일 매일 목에 풀칠하는 것이 힘들었다. 우리 집 근처에 막걸리 공장이 있었는데 막걸리 만들고 남은 찌꺼기가 쌀보다 싸서 그 것을 먹고 술에 취해서 학교에 갔다고 둘째형이 명절 때마다 이야기 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루하루 죽지 않고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당시 어머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 이외는 없었다. 아니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흐느낌이고 한탄이며 비명이었다. 기도라기보다 몸부림의 한 방법이었다. 매일 밤마다 두 무릎을 모으고 엎드린 상태에서 비계에 머리를 대고 흐느낌 과 울음상태에서 잠이 들곤 하셨다. 아니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님이 기도하는 것을 매일 자는 척하고 들었으나 어머님의 기도의 끝은 들은 기억이 안 난다. 그 길고 긴 기도 모두가 우리들을 굶기지 않고 키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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