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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믿음이 좋았던 것인지 어리석었던 것인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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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았던 것인지 어리석었던 것인지.....6

(실은 “믿음이 좋았던 것인지 어리석었던 것인지.....”라는 제목의 글을 시작한 목적이 바로 바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자꾸만 길어져서 시리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도 없고 글을 쓰면서 회의가 많이 들어 이 글로 마치려고 합니다.)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청년도 서너 명 출석하게 되고, 시내로 가셨던 집사님 부부도 돌아오시고, 그동안 쉬고(?)계셨던 분들도 오시고, 새로 나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십오륙 명까지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곧 신대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목회다운 목회를 해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학교를 졸업하자 그곳을 떠나와서 그곳 성도님들께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아내는 그 때, 두 가지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기도도 많이 하지 않고 일하다가 부딪히면 고민하고, 그때서야 기도도 조금하고 그러는 편인데 아무래도 영성의 면에 있어서 아내가 저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는 그 곳에서 제가 학교 다니는 동안 성도 가운데 소천하신 분이 계셔서 학교에 못가게 되는 일이 없게 해 주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모든 학기를 다 마치자 두 분이 하루걸러 같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회도 출석하지 못했던 아주 늙은 할머니들인데, 그래도 예수님은 영접한 분들이셨습니다.
한분은 같이 예배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고, 한분은 임종예배를 드린 후 교회에 돌아와 있을 때 임종하셨습니다.
그 때, 동네 사람들의 괜한 시비가 있었지만 기독교식 장례를 은혜롭게 치를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기도제목 가운데 다른 하나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가거나,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못 사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라는 기도였습니다.
아내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듯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학비 주시지 않으면 학교 쉬도록 하겠습니다. 빚내서 학교 다니지는 못합니다. 알아서 하세요. 주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신학을 시작했지만 서두를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학비를 주시면 다니고 안 주시면 휴학하고 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일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는 정말 돈 한 푼 없는 때였습니다. 쌀이 바닥을 긁을 때가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쌀이 떨어질 때면 누군가가 갖다 주셨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도 않는 할머니가 머리에 쌀을 이고 오실 때도 있었고, 동네에서 구두쇠로 소문난 분도 쌀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반찬은 교회당 옆의 텃밭에 채소를 심은 것으로 해결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가져다 준 채소로 얼마든지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가난한 집에 웬 손님들도 그렇게 많이 오셨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는 손님이 오시면 돈이 들겠지만, 시골에서는 시장에 나가기도 힘들고 해서 그 안에서 다 해결을 합니다.
아내는 없는 중에도 솜씨를 발휘하여 잘 대접해 드리곤 했습니다.

학교를 계속 다닐 때는 학비 외에도 한 주에 오륙 만 원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차비며 식비를 내야 했고 책도 사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왔습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분들이 지나다 들러서 적게는 오륙 만 원, 때로는 몇 십만 원의 돈을 놓고 갔습니다.
그 돈은 꼭 필요한 돈이었고, 필요한 외에는 전혀 남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신학을 시작하면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의 명단을 기록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공부를 마치도록까지 그분들로부터 한 푼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때 도움을 주셨던 분들은 전혀 모르는 분들이거나 아는 분들이라고 할지라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저의 생각에 학교에 갈 때마다 부족하지 않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좀 여유가 있겠지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방학 때는 정말 돈 한 푼이 없어서 외출도 못하고, 집에 있거나 동네를 한바퀴 돌거나 방죽  가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놀아야 했습니다.
뻔한 동네에서 전도한답시고 돌아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냥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은혜에 젖기를 바라며 동네 주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방학 중 저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방학이 끝날 때 쯤 되면 학비라는 거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휴학해야 할 모양이야!”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기다려 보지요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등록 할 때가 되면 학비가 맞춰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등록금 끝에 붙은 천원단위까지 꼭 맞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교회 사역을 할 때 한번도 큰 교회에 생활비보조신청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처음 살길이 막막했을 때에 보조신청서를 십여 장 써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누구에게도, 한 장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은 낯이 간지러워서 정말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아시고 필요한 만큼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저는 아내와 밥을 굶지 않고 살았으며, 두 딸을 낳고 길렀습니다. (셋째와 넷째는 그 다음에 낳았지요.)
그리고 신대원 3년간 빚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발걸음 발걸음마다 다 감격의 순간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대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학교 기숙사에 있는데 두 분의 전도사님이 우리 방에 놀러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사역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우리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 전도사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야? 그 정도였어? 우리는 네가 괜찮은 교회에 있는지 알았잖아! 아니 그런데 왜 그 교회에 붙어 있는 거야? 그 교회는 주소가 광역시로 되어 있어서 보조금 받기가 쉽지 않아! 섬이나 시골교회로 가는 게 더 좋아! 거 누구 있잖아! 그 사람은 이삼백 만원은 받는다구! 지금 학교 다니는 동안에 보조금을 많이 받아서 나중에 개척하든지 할 때 돈이 필요하잖아! 그 때를 위해 저축도 해 놓아야 하잖아! 너!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게 아니야 어리석은 게지!”

저는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이 막히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 대하여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불쌍하기도 하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정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게 아니야 어리석은 게지!” 이 말이 계속 귀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골이나 도서지방의 사역자 가운데 한 두 명이 필요이상의 보조금을 신청하여 풍족하게 받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말을 직접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서, 그런 한 두 명의 목회자 때문에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움 가운데 헌신하는 벽지나 도서지방의 많은 목회자들이 한꺼번에 욕을 먹게 되고, 더욱 생활이 어렵게 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저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간단히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고 평가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말처럼 어쩌면 제가 어리석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신학공부를 시작한 이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달리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도 아르바이트며, 노동이며, 장사 등을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저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부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전에 공인중개사자격증을 땄었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어떤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자격증을 빌려주면 오륙십 만원은 책임지고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격증을 빌려주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격증을 가진 사람 명의로 사무실을 차리고, 실제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형식을 빌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아예 그런 말에 두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료 전도사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참 제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분들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래! 믿음이 아닐지라도 어리석게 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가 되었고 교회를 개척한 지금 가끔 그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런 말을 듣는다면 그렇게 분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제가 분노하였던 것은 제 스스로 믿음이 좋은 양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이 저를 평가했듯이 제 나름대로 그분들을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분노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저처럼 어리석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완(?)이 뛰어나 자금을 동원하고 큰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안에서 못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어리석은 모양입니다.
그냥 생긴대로 어리석게 살아가렵니다.

그 때 저는 '믿음이 좋았던 것인지 어리석었던 것인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던 것에 대하여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또 이렇게 길어져 버렸습니다.)

          
順天바람직한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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