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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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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 시절 휴가를 떠날 때면 아무리 혹한기의 살을 에는 찬바람도 위병소를 벗어 나는 순간 어느새 살랑거리는 봄바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휴가를 마치고 복귀를 할 때면 모처럼의 한겨울 따사로운 햇볕마저도 부대 담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황량한 햇살로 변하여 병사의 어깨를 더욱 움 추리게 합니다. 군에서 맞는 겨울은 밖에서의 그것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계절인 것입니다. 제가 근무한 논산훈련소는 전방고지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황산벌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해마다 겨울이면 세차게 불어 닥치는 찬바람에 훈련병들도 기간병들도 매우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군 생활에서 가장 힘든 업무는 훈련이나 작전에 참가하는 것 보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각 부대가 담당하는 몇 곳의 외곽 초소를 지켜야 하는 야간 경계 근무였습니다. 훈련소에서는 기간병 1명과 훈련병 2명이 1개조를 이루어 한시간씩 교대근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취침 중에 일어나 총과 복장을 갖추어 초소에 다녀 오려면 2시간은 소요되었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이상 근무가 돌아 오기 때문에 아무리 건장한 청년일지라도 하루 종일 교육과 훈련에 지쳐있는 몸으로는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특히 한 겨울의 근무는 겹으로 신은 양말도, 잔뜩 껴입은 방한복으로도 매서운 추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온몸이 얼어 붙고 잠은 쏟아지고 또한 한밤중의 적막함에 어느 순간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를 때도 종종 있습니다.

조교로 이등병 시절을 보낸 후 연대본부의 정훈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정훈과는 병사들의 정신교육과 각종 방송장비, 신문 등의 매체를 관리하는 부서입니다. 정훈과로 옮긴 그 해 겨울 국방일보의 기사를 통하여 “군복음화후원회”에서 <사랑의 온차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청하는 부대는 심사를 거쳐 플라스틱 보온병 2개와 수백명분의 3개월치의 커피와 설탕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이 일을 내가 맡아 할 수 있다면 야간 경계 근무를 하는 기간병과 훈련병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나누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휘자로 섬기고 있는 연무대군인교회의 집사였던 연대장님은 기꺼이 이 계획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침 일찍 외출 허가를 받아 종로의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의 “군복음화후원회” 사무실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군인들이 분주히 물품을 받아 가고 있었고 저 역시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물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어서 포장된 3개의 박스는 매우 크고 무거웠습니다. 당장 부대까지 옮겨갈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주위를 살피니 대부분의 군인들은 군목과 군종병으로 부대나 교회의 차량을 갖고 왔지만 저는 군종병도 아닌 것이 덜렁 일을 벌여 놓고는 버스타고 기차타고 단신 상경하여 이 많은 짐을 들고 내려 가려니 참 난감하였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라고는 규정대로 받은 여비 뿐이라 택시를 탈 수도 없고 낯설기만 한 서울 땅에서 막막했습니다.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앞에는 버스가 다니질 않습니다. 일단은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짐을 옮겨야 했습니다. 설탕이 담긴 박스 하나를 길 모퉁이까지 끙끙대며 겨우 옮기고는 어리숙한 일등병 누가 내 물건 훔쳐서라도 갈까 걱정이 되어 급히 뒷걸음쳐 돌아와 남은 커피와 크림 박스에 보온 물통을 조심스레 올리고는 서둘러 짐을 옮깁니다. 또 다시 설탕 박스 짊어지고 다음 모퉁이 까지 옮기고는 되돌아와 남은 박스를 옮깁니다. 허리는 끊어질 듯이 휘청거리고 숨은 턱 밑까지 차오릅니다.

간밤에 내린 눈에 얼어 붙은 길바닥은 왜 그리 미끄러운지, 서울의 바람은 왜 그리 매서운지, 시내버스에서 내리면 넓은 서울역 광장 가로질러 기차 타는 곳까지는 어떻게 옮길 것인지, 대전역에 내려서 논산 행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논산에 내려서 부대까지는 또 어떻게 옮길 것인지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길가 가로수에 기대어 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으니 낯선 트럭 한대가 옆에 와 섭니다. 어디까지 가느냐는 질문에 서울역 간다고 하니 여기서는 바로 가는 버스가 없다며 짐칸에 짐을 실으라고 합니다. 군인 아저씨 힘들게 짐 나르는 것이 불쌍하다며 일부러 서울역까지 태워 주고는 떠나 갑니다. 그날 어떻게 그 무거운 박스 3개를 짊어 지고 서울에서 부대까지 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기만 합니다.

매 주 월, 수, 금 새벽 2시에서 4시까지 뜨거운 커피를 타서 <사랑의 온차 나누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매우 좋아 했지만 함께 근무하며 안면이 있는 부대원들이라 쑥스럽기도 하고 또한 커피 한잔에 예수 믿으라고 말하려니 야박한 것도 같아 처음 얼마 동안은 부지런히 커피만 타서 날랐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부터는 연약한 믿음이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 외곽 초소에 와서 뜨거운 커피를 나누어 주니 군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잘 들었습니다. 고참병들 중 어떤 이들은 괜히 함께 근무를 나온 훈련병들에게 잘 새겨 듣고 교회에 나가라며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남 걱정하지 말고 병장님부터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저 역시 정해진 야간근무와 해야 될 업무로 늘 잠이 부족하고 피곤하였지만 ‘사랑의 온차 나누기’를 통하여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기간병들이 늘어갔고 외롭고 힘든 훈련 가운데 낙심했던 많은 훈련병들이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알 수 없지만 그 때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 중 단 한 생명에게라도 움튼 싹이 있다면 저는 세상을 모두 소유한 행복한 사람입니다.

현장에서 커피를 나누며 복음을 전한 이는 나였지만 이 일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랑의 후원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과 기도로 후원한 전국교회의 성도들과  “군복음화후원회”,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연대장 집사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트럭 운전 아저씨…, 결국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음을 믿습니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새벽,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콧노래로 찬양하며 걷던 그 길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시온찬양대 대원 여러분! 올 한해 우리에게 다시금 귀한 직분이 맡겨졌습니다. 무엇보다 대원, 파트장, 총무, 대장, 반주자, 지휘자 등 모두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우리 시온찬양대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구별되고 온전한 찬양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새해에 모든 대원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성안교회 시온찬양대 회보> 지휘자 칼럼  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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