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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청부론인가? 청빈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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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각에서 목회자의 사례문제가 대두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에 대하여 지난해 "구약신학"이라는 시간에 발제했던 내용인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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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기독교사상 2002.11월호에 협성대의 김영봉 교수님이 쓴글을 요약한것입니다.

1.청부론, 왜 경계해야 하나?
지난 백년동안 한국교회의 주된 흐름중의 하나이었던 청부론의 바람이 최근에 또다시 불고있다.
지난 30년간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대형교회들은 대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약속하고 선전하던 현장 신학의 중심지였다.

30년이 넘도록 청부론을 추종해온 결과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는 이루었지만 정신과 인격면에서 빈곤함을 겪고 있으며, 축복의 복음을 선전하던 많은 목회자들은 은퇴를 전후하여 인격과 정신과 신앙의 바닥을 드러내며 추하게 전락하고 있다.
기독교인과 교회는 양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커졌지만 사회적인 영향력과 영도력을 잃어버리고 "밖에 버리워 밟히는(마5:13)상황이 되었다.

이러한때에 최근의 영향력있는 저술가들 가운데 청부론 바람의 조역의 역활을 담당하는 이들의 주장은 과거 논리적, 신학적 바탕이 매우 약했던 것에 비하여 논리적 호소를 통하여 독자들을 파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우려가된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때 청부론의 요점은 이렇다.
"그리스도인이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고 나면 그 나머지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주어진다.
버는 과정에 있어서 깨끗하고, 수입에 대한 몫가르기에 있어서 깨끗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도 깨끗해진다.(더 이상 책임이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과거 부흥사들은 돈을 버는 과정에 대해 거의 침묵했다.
물질적인 복을 받는 신앙적 비결과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말해왔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돈버는 과정에서의 정직성에 대해 소홀했다.
이에 비해 최근의 청부론자들은 정직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라는 아픈 소리를 던진다.
이것은 충분히 인정해야 할 공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최근의 청부론 바람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은 성서적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편향되이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얼른 보면 충분한 성서적 근거를 가진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된 사람의 확신은 과거보다 훨씬 강하다.
확신이 강해지는것에 비례하여 위험성이 증가한다.

2. 부와 가난의 개념
그러면 부와 가난의 기준은 어디에 둘수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10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50억원을 가진 사람도 200억을 가진 사람과 비교할때 스스로를 부자라 생각하지 않을것이고, 1억을 가진 사람이라도 빚에 허덕이는 사람과 비교할때 스스로를 부자라 생각할 수 있기에 부의 객관적 기준을 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의 평균 수준보다 높은 경제적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경제적 실력을 주로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경제적 실력으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조건을 구축한 사람을 부자라 한다.
가난에 대해서는 넓게 보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력이 있지만 충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반면에 좁게 보면 다른 사람에게 신세지지 않고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난이라 한다.

카톨릭 사상가인 도로시데이 (DOrothy day) 는 원치않는 경제적 곤경에 빠진 경우를 적빈이라 하는 반면 스스로 택한 경제적 자기 비움을 가리켜 가난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적빈이나 가난이라는 말은 경제적인 자유가 제한된 상태를 가리킨다.
생활 필수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적인 가난도 있고, 필수품에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 정도의 가난도 있다.
어쨋거나 두 경우 모두 원하는대로 돈을 쓸 수 없는 상태인점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수준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청부론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부자로 사는 것을 바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헤르만 몰데즈는 가난과 부(ivp)에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가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고 지적한다.

그러면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고통을 당하는가?
몰데즈는 그 뿌리를 인간의 타락에서 본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질서는 깨지고 인간은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혔다.
이로인해 인간 사회는 생존 경쟁의 싸움터가 되었고 가난이라는 질병이 생겨났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에 찌들리는 것을 바라시지 않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때까지 가난은 인간 사회의 불변의 조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은 하나님의 관심을 받드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비범한 능력을 힘입어 생존 경쟁에서 이김으로서 부자의 대열에 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가난하게 함으로 가난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모델을 닮아 가난에 참여함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 가난의 종류
  1) 게으르고 나태하고 안일한 생활 때문에 야기되는 탁빈이다.
성서는 이 가난을 칭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생활을 규모있게 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을 권고한다.
(잠언 13:4, 19:15, 살전4: 11-12)

그러나 문제는 탁빈의 이면에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2)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견고한 태도 때문에 가난해지는 유교적 이상인 청빈이 있다.

4. 청빈과 청부를 넘어서
깨끗한 부를 열망하며 분투하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발적 가난을 열망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요청하신다.
즉 다른 형제 자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이다.

나눔으로 가난해진다는 말은 빈털터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정도 이상의 재물을 혼자 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많이 누리고 기름진 것을 먹고 호화롭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소박하게 살며 가난한 형제들을 보살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물에 대한 성서의 사상은 유교의 청빈사상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훨씬 넘어선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불의한 재물에 욕심을 두지 않는다.

그 결과로 가난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그렇게 살면서도 많은 재물을 얻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점에서 유교의 청빈 사상과 청부론자들의 입장은 일치한다.
깨끗한 재물이니 마음껏 누려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달리 말한다. 잉여 재물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고 한다.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기를 택함으로 세상의 가난을 치유하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신학도이기전에 한사람의 진정한 크리스찬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목회자의 재물관에 대한 본보기로서의 요한 웨슬레)

마무리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자발적 가난을 주장하며 실천했다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와 가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요한계시록 2-3장의 서머나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계2:8-9, 새번역성경)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3:17-18, 새번역)

         아굴의 기도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잠언 30:7-9,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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