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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등골 이야기 17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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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부임 후 첫 심방을 갔을 때 이(李) 집사님은 "나는 아들 하나 밖에 못 낳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열 다섯 꽃다운 나이에 어등골 원정마을로 시집 와서 10여년만에 어렵사리 아들 하나를 얻은 집사님…, 그래서인지 집사님의 여인으로서의 애환과 아들에 대한 애착은 여느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각별했습니다.
  
   가을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지난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온 이 집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목사님, 우리 아들이 입원 했단 말이요…간암이라고 헌디…살랑가 죽을랑가 모르겄소…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디…오메 나는 그 자식 죽으믄 인자 남 부끄르와서도 교회 못 나와라우" 하면서 축 처진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바람을 했습니다.

   그 날 오후 나는 십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문병을 다녀왔습니다. 그 후 집사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몇 번씩 머리를 조아리며 "목사님이 우리 아들 위해서 기도해줘서 많이 좋아졌당께라우…우리 며느리도…교회는 안 나간디도 얼마나 고마와 허는지 몰라라우. 인자 병 나수고 나면 교회 나간다고 헙디다"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많이 좋아져서 곧 퇴원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새벽기도회 시간에 집사님은 아들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갔다고 귀뜸해 주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시간이 흐를수록 집사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집사님은 밝게 웃는 얼굴로 "목사님, 우리 며느리한테 전화가 왔는디라우…인자 많이 좋아져서 얼매 안 있으면 곧 내려온다고 그럽디다" 하고 말하면서, 눈시울까지 붉혀가며 기뻐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우리 아들이 집에 왔닥허요이"하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그 아들이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영안실로 들어서자, 나를 발견한 집사님은 "아이고" 소리와 함께 내 품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든 셋, 집사님의 몸은 세월의 껍질을 훌훌 다 벗어버린 듯 새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집사님을 부축한 채 빈소로 들어간 나는 잠시 기도와 찬송, 그리고 말씀으로 유족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집사님은 다시 내 팔을 붙잡고 오열했습니다.
   "…목사님, 인자 나는 어떻게 산다요…인자 나는 어떻게 산다요…."

   울부짖는 집사님의 등을 다독이면서 나는 말했습니다.
   "…집사님, 인자부터는 저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집사님은 눈물 그렁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인자부터 제가 아들해 드릴께요."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남자 집사님들도 거들었습니다.
   "인자 저도 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도요."

   이에 젊은 여집사님들도 "그럼 나는 딸할께요" "나도요" 하면서 딸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며느리와 손주들의 눈에서는 웃음 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이 집사님은 성도들의 염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모든 예배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더불어 목사인 나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 젊은 남녀 집사님들은 오늘도 집사님의 아들과 딸을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 어느 교회보다도 행복한 가족같은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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