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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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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한규)

  우리는 기독교를 해결 받고 요구하고 하는 차원의 종교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받으려고 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주려고 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뻐하느냐?" 하는 차원의 종교입니다. 이제는 간증도 "기적적으로 받았다!"는 간증보다는 "기쁘게 주었다!"는 간증이 더 많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뻐하느냐?"에 따라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물질보다 영혼을 사랑하고,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삶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가장 소중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이라는 말은 사랑의 위대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씀의 핵심은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너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도토리 씨앗을 땅에 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씨앗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와 햇빛을 주셨고 그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썩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셨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차라리 썩은 나무를 짤라버리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10살 많은 한 매형이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참 개를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진돗개를 좋아했습니다. 힘이 있고, 충성스럽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하니까 아주 반했습니다. 그래서 진돗개를 기르는데 그 진돗개 이름이 '백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매형에게 흰색 푸들 한 마리를 주어서 그 집에 개 한 마리가 더 생겼습니다. 그 푸들 이름이 '린다'였습니다. 개를 좋아했던 매형은 실내에서 키우는 린다도 마당에서 키우는 백구만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매형 집에 자주 들렸기 때문에 린다가 어릴 때부터 커 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저도 린다가 예쁘고 귀엽게 생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예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린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점차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도 교만해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확실히 눈에 띄게 교만해진 행동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매형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끔찍하게 위해주는 매형에게 딱 달라붙어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 개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데 저렇게 주인 믿고 까불다가는 언젠가는 다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형의 딸아이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을 줄 알았는데 점차 심하게 되었습니다. 딸을 위해서 시간을 더 내야 했습니다. 가정 환경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개털도 날라 다니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끔찍하게 예뻐해 주었던 린다도 금방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린다가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예뻐해 주어도 사랑하는 자녀와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개를 위해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1986년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는 엄청난 월급을 받고 감격했습니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쓸까?"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월급을 받으면 저축을 하고 결혼 준비를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할 줄 몰랐습니다. 결혼은 그냥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저축하지 않고 열심히 썼기에 1년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에는 퇴직금 외에는 거의 한푼도 없었습니다. 남자가 술담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옷을 사 입는 것도 아니고, 사치스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겠습니까? 거의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다 썼습니다. 저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제일 앞서서 낼 줄 아는 선수(?)'였습니다.

  결국 미국에 갈 때에는 모은 돈이 없어 퇴직금으로 비행기표를 마련해서 갈 수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사역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등록금과 숙식을 스스로 조달해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면서도 '내는 버릇(?)'은 여전했고, 섬기는 교회가 건축할 때에는 한 학기 등록금을 다 내버리고, 방학 때가 되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하면서 다시 등록금을 마련해 신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니까 결혼 준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92년 32세에 결혼할 때에도 돈 한 푼도 없이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결혼생활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돈 때문에 아내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저축은 하지 못했지만 남편으로서 가정의 재정적인 책임은 한치도 소홀함이 없이 졌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식구들에게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고 있습니다.

  항상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내는 손'만 잘 조절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저도 안전을 좋아합니다. 윤택한 목회의 길을 떠나 어려운 목회의 길을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내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수많은 기쁜 일들이 있지만 '내는 것'만큼 기쁨을 주는 일은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물론 내는 삶을 살려면 내 안전을 걸어야 하지만, 내 안전을 걸었을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더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내는 버릇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식당에 가면 제일 안 내는 사람 1위가 목사이고, 2위가 교사이고, 3위가 법조인이라고 합니다. 항상 대접받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왜 목사가 대접만 받아야 합니까? 저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대접할 것입니다. 대접하는 기쁨을 다 빼앗긴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주는 기쁨, 내는 기쁨만큼 큰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 기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쁨을 위해서는 저의 안전을 충분히 걸 각오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회하는 교회를 위해, 교인들을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친척들과 친구들을 위해 항상 기쁘게 주려고 할 것입니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주는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인터넷 사역을 이제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 이상의 귀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제가 주는 삶을 위해 애쓰고 있을지라도 저의 자녀들만은 결코 줄 수 없습니다. 저는 두 명의 소중한 딸이 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할 때 그들이 살 수 있다면 기쁘게 제가 대신 죽겠다고 할 것입니다. 제가 주는 것을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저는 저의 두 딸만은 어떤 선한 일을 위해서라도 죽음에 내어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틀 전에 이 '주는 삶'을 묵상하면서 두 딸을 줄 수 없는 저의 모습을 보고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이 얼마나 새롭게 부딪쳐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 아들이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긴급히 피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헌혈을 자원했습니다.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필요한 만큼 피를 뽑으세요. 저의 생명이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들만은 꼭 살려주세요." 아들이 사는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정말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8년 전 성탄절 전날 아침 11시에 인천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난 첫 딸 은혜를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이처럼 사랑하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2년 동안 개척교회를 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을 보면서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정도까지의 사랑의 감정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첫 딸 은혜를 보고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깊이를 처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침대에서 자는 두 딸의 모습을 보면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는 그 사랑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 자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들뜨고, 너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 두 딸을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죽음에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처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후략 >

사랑과 따뜻함을 전하는 사이트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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