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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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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지은 이유 ###
본 내용은 고 김석준 목사님께서 생전에 조직신학 인죄론을 강의하신 내용 중에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하여, 그 형상관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형상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는 그 문제만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 논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왜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야 했는가’ 하는 그 원인(原因)이나 동기(動機)나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목적(目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한 분이 없다.

우리가 아래의 이치를 연구하다가 그 이치에 대해 잘 모르겠을 때에는 위의 이치를 깨닫고 나면 아래 이치는 자연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① 신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하고,
② 이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하고,
③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고.
④ 영과 육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도 하고,
⑤ 인간이 원시인 인간에게만 원의(原義)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형상 유실론(遺失論)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각양의 논리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데 대해서 원인이나 동기나 목적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임을 자연적으로 쉽게 알게 될 것이므로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하는데 대해서 장시간을 두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느냐?  짓자고 했을 때는 동기와 원인과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타락했기 때문에가 아니고 영원 전서부터 해 오고 있었다.  다만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타락을 허용(조장이 아님)했다.  타락은 구원순서 중에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행복한 안락처, 행복한 사건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적 낙원처가 어디냐?  이곳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지었다.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니었더라면, 또한 천국의 안락처가 없더라면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개체가 전체가 되면 극락이라고 하는가 하면 대개의 기독자들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원시상태로(타락 전의 상태) 영원히 살게 했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비참해졌기 때문에 타락한 그 인간을 타락 전의 상태로 원상복귀시켜 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하기 전의 원시상태로 돌아가자’고 하게 되면 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관과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은 원인 동기 목적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구원의 당사자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1. 원인.

신(이하 신=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것은 피조물을 다 만들어 놓고 보니 만들어 놓은 그 피조물들을 이용할 존재가 필요하겠기에 그 존재로 인간을 만든 것처럼 볼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보는 자들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피조물을 위하여 지음을 받게 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창조의 순서는 만물이 선행적으로 피조 되었고, 인간은 마지막에 지음을 받았으나 인간을 위해서 만물을 지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은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라면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짓게 된 원인이나 동기는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은 만물을 위해서 지으신 것도 아니요, 또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절대로 필요해서, 또는 인간이 없으므로 해서 당신의 절대성이나 완전성에 부족감이 있어서가 아닌 인간을 위해서 만물을 지으신 것인데 인간을 지으시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당신의 형상이 곧 인격성인데, 당신의 인격성이란 곧 속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 속성인 인격성이란 쾌락성 향락성 만족성을 느낄 수 있는 요소로서 이 인격성이 원인이 되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격성이 없는 무인격적인 존재였더라면 인간을 창조할 수도 없고,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 자신이 인격자이기 때문에 이 신과의 인격 대 인격, 형상 대 형상의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원인은 곧 당신의 형상인 인격성에 의해서이다.

형상이라는 말을 인격이라, 성질이라 해도 그 뜻이 완전히 표현되지를 않는다.  인간의 용어를 빌어쓰자니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격성은 어떤 기관인가?  기쁨을 만족을 쾌락을 느끼는 기관이요, 형상이다.  이것을 인간에게 넣어준 것은 이것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인격이 없어서 아무리 좋은 곳에 넣어도 그것을 느낄 줄 모르는 존재라고 하면 인격이라는 명칭도 글자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좋고 나쁜 것을 느낄 줄 아는 인격자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누릴 곳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이 천국이다.  인격자이기 때문에 행복적인, 쾌락적인 곳이 필요한 것이다.  이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의 주관적인, 행복적인 울타리 라인(보금자리, 안락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기가 자기를 축소시키지 말라!

2. 동기.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동기는 만물이 있기 때문에 그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독존적 생존적 인격적으로 당신의 무한계 완전계 신령계를 지배하고 사용하고 누리실 때 그 가치성이 당신의 인격성에서 효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것이다.  만일 그 신령계 무한계 완전계가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인간을 지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짓고자 하는 동기도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당신이 누리시는 그 신령계 무한계 쾌락계 향락계 만족계를 당신만큼 효율적으로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신의 형상인 인격성이 필요했다.  그런고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게 된 것이다.

1) 신령계의 쾌락성이 동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신령계가 어떤 곳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곳은 물질계가 아님은 틀림이 없다.  물질계는 아니지만 물질계 이상으로 쾌락성이 충만한 곳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도요한이 진리로 인하여 밧모섬에 귀양가 있을 때 주님은 그 요한에게 미래의 신령계를 물질계처럼 보여 주셨는데 요한이 그 세계를 물질계처럼 보기는 했으나 그것은 물질계가 아니고 신령계임이 틀림이 없다. 

그 때 요한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영육 결합체로 있는 고로 물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요한이 영안으로 본 그것을 이성을 통하여 느끼도록 하자니 물질계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깊이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3층천에 올라가서 이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는데 바울이 본 그 세계도 신령계임이 틀림이 없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그 신령계와, 바울에게 보여준 그 신령계는 각이한 곳이 아니고 동일한 곳이었는데 이것을 바울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고, 무엇으로 상징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로 말할 수 없는 세계’ 라고 말했고, 요한은 자기가 본 그 세계에 대해 그 때 당시에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물질계에서 최고 가치 있고 좋은 명칭들을 들어서 표시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 때 당시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나 용어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본 그것을 인간이 사용하는 명칭이나 용어로는 정확하게 표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세상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명칭과 용어를 인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이 말한 대리석, 혹은 진주, 혹은 열두 보석 하는 이것은 세상 인간들이 말하는 물질의 보석은 아니다.  즉 옛날 페르샤 왕궁을 꾸몄던(에1장) 그 보석과 같은 물질의 보석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쾌락성이란 이 세상 타락한 인간들이 쾌락이라고 하는 그런 저속하고 조잡하고 저질적인 쾌락이 아니다. 

우리가 물론 믿을 수는 없으나 옛날 신화 같은데 보면 믿음 좋은 사람들이 깊은 산에 들어가서 신령들을 보았는데 그들을 신선들이라 하면서 그들의 쾌락성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흥풀이 하는 그런 저속한 쾌락성이 아닌 조용한 가운데서 글짓기나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는 그런 것을 연상시켰다. 

저속하고 무식한 사람이 그러한 것을 본다면 신선들의 그런 행동들이 쾌락이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은 그것이 쾌락인 것이다.  그 쾌락세계에서 잠시간 구경을 하고 돌아왔는데 수백 년이 흘렀다는 신화가 있기도 하다.  이것은 신령계의 쾌락성과 신령계를 염두에 두고 비유적으로 해 본 말이다. 

성경에 보면 그 나라의 쾌락성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쾌락이요, 노래 부르는 쾌락이요, 하나님 앞에서 합창으로 화답하는 쾌락이라고 말을 한다.  그 나라의 쾌락성은 이 세상에 있는 쾌락이라고 하는 쾌락과는 전혀 다른 고차원적 불변적 영원적 쾌락성임이 틀림이 없다.

천국은 이런 쾌락의 세계인데 이 쾌락은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성으로서만이 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이 아니고는 그 세상의 쾌락을 누릴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 나라의 쾌락은 어떤 존재든지, 혹은 목석이나 금수라도 그곳에만 가면 누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인적인 명철 민감 민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했다면 인적인 그 인격으로서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이란 천국은 성분적으로 성질적으로 하나님과 단일된 곳인 고로 그러한 것이다.

어떤 때는 심히 도취해 버리면 내가 어디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천국이 너무 쾌락적이기 때문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바울의 육신의 몸이 3층천에 올라간 것이 아니고 영안의 눈으로 천국을 생생하게 보았다. 

이것을 글로 쓰면 인간용어의 한계성과 표현력의 한계성 때문에 축소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 바다보다 넓다’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축소되어 버린다.  인간이 쓰는 용어나 문자로써 천국을 다 형용 못한다.

요한은 본 그곳은 인간이 쓰는 용어나 명칭을 가지고 표현한 그 정도가 아니고 그보다 더하다.  요한이 본 그것이 전부라면 이 세상에서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꾸며 놓을 수 있다.  천국은 그 이상이다.(고후9:15, 12:4)

그 세계가 너무 쾌락적이기 때문에 선성과 애정성의 극치이신 그 분이 당신 홀로 그 세계를 누리기를 원치 않으시고 인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나처럼 이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충동이 발생을 하게 돼서 이를 위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동기가 된 것이다.  천국에 쾌락성이 없으면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동기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좋아하면 하나님께서는 시기가 날까?  ‘너 좋으니 나 좋고 나 좋으니 너 좋고, 그 성도가 은혜 받고 좋으니 나도 좋고’ 하는 이것이 생명의 세계요,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나온 선성이다.

2) 천국의 무한성이 동기가 됨.
하나님이 누리시던, 혹은 누리고 계시던 그 천국은 하나님께서 과거적으로도 무한히(시간적) 누려 왔고, 미래적으로도 무한히 누릴 천국이다.  천국의 그 쾌락성이란 불쾌성이 병행되거나 고락으로 교체됨이 없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누리는 쾌락성이다.

만일 그 신령계가 유한된 낙원의 곳이라면 얼마 가다가 없어질 것이니 구태여 인간을 만들어서 그 인간들로 하여금 그 세계를 누리도록 인격성을 입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세계는 시간적으로 미래적으로 무한히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신의 모형인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그 신령계의 쾌락성은 양적으로 당신 홀로 누리시기에 알맞은 것이고, 당신 외에 어떤 다른 한 존재가 나타나서 그 쾌락성을 같이 누리게 되면 당신이 누릴 쾌락이 삭감되거나 손실이 되어 당신이 누리는 그 쾌감성이 빈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존재가 와서 천국의 그 쾌락을 함께 누린다 할지라도 모두가 누리는 그 누림성은 양적 질적으로 감소되지 않는다. 

그 나라는 먹을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먹을 것이 무한하고, 마실 자가 아무리 많아도 마실 것이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무한한 것을 홀로 누리시기보다는 이것을 다른 존재로 하여금 누리게 하길 원하셨으니 이렇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에게 그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영적 실력인 신의 형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3) 천국의 완전성.
천국이란 천국은 모든 것이 최고 극치요 완전이요 무한계이다. 

완전이라는 이 말은 고통이나 불행적인 것이 병행하던가 혹은 혼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한 이 이상 더 좋은 곳이 없다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쾌락적으로 완전이요, 향락적으로 완전이니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미비하거나 미숙하거나 불완전한 것이 결코 없는 곳이니 이 완전이라는 말은 양적이라기보다도 질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천국 자체는 양적 질적 완전이지만 천국에 갈 성도들이나 세상에서 구원 얻어 천국에 간 성도들은 그 천국의 완전에 비하면 거의가 미달된 상태다.  능력적 미달이요 지능적 미달이요 기능적으로 미달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현존세상에서 그 천국을 바라보고 자기를 하나님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가야 한다.

4) 천국의 충만성.
물질계에서 물질적인 것은 사용을 하면 사용한 것만큼,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것만큼 감소가 된다.  그러나 이 천국은 감소가 되지 않는 곳이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완전이라는 말에는 충만이라는 뜻도 포함이 된 것인데 이 충만이라고 하는 말은 계속적으로 솟아나 넘쳐흐른다는 뜻이다.  즉 항아리와 그릇에 있는 물은 마신 것만큼 줄어들지만 물이 솟아나는 샘에서는 언제나 그 물이 넘쳐흐르듯이 그 세계는 마신다고 먹는다고 사용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계속 넘쳐흐른다는 말이다.

이 천국은 거룩하고 행복적인 것이 언제나 충만하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 충만을 인간으로 하여금 맛을 보게 하고 먹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다.

이 천국은 외래적인 기쁨도 있고 내발적인 기쁨도 있다.  또한 외래적 만족도 있고 내발적인 만족도 있다.

3. 목적.

하나님께서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실 때는 일반적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만은 특별히 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데 이렇게 창조하심에는 필연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성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인격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니 이러한 분께서 인간을 이렇게 거대한 물질계, 혹은 우주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인격자로, 혹은 신의 형상대로 만듦에 대해서 아무런 목적이 없이 지으셨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이 목적성에 대해 여러 이설들이 없지는 않다.
① 그 목적성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물질계를 맡겨서 통치하고 지배하고 수호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한다.(창1:27)

이렇게 되면 원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가 없어진다.  만물을 창조해 놓고 보니 ‘이 세계를 통치할 자, 다스릴 자가 필요하구나’ 해서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된다.  결국 ‘만물을 위해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가 된다.

② 당신이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목적으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반물질로 이미 누리고 있는 그 영광이 부족해서 인간을 지은 것이라고 보게 된다.

사람의 제 1 되는 목적은 그를 영화롭게, 영원히 즐겁게 하는 것?  말은 맞는데 해석을 붙이라고 하면 틀리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인간 내가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속성을 입으므로 그 분은 영광이 되고 좋아한다.  이 세상은 받은 것으로 되지만 천국은 주는 것으로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이냐?

③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성과 존영성을 알아 드릴 자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자 완전자 만능자이시지만 이걸 누가 알아주는 자가 있어야지!  인간 아닌 만물을 지어 놓아봐야 인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능력을 알아주는 자를 만들어야 하겠기에 인간을 만들었고, 그 능력을 더 실감나게 알아달라고 홍수나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전쟁 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④ 계약적 대상을 삼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으니 상대성 원리처럼 당신의 거룩성과 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인격자로 지어서 선악과를 만들어 그것으로 계약조건을 삼아 인간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가 아니면 계약적 상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계약적 상대자를 삼기 위해서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각이한 이설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1) 신자(神子)를 삼기 위해서.(엡1:5)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설들도 성경에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다 성경을 근거해서 한 말들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신론에 의해 본다고 하면 이 이설들은 아무래도 불완전한 감을 피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속성 면이나, 완전성 면에서 볼 때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한 신의 아들의 자격을 삼기 위한 것이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목적이라는 것이 가장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자녀는 필연 그 부(父)를 닮아야 하는 것이다.  부를 닮는다는 말은 외모를 닮는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본질과 본성적으로 닮아야 하는 것이니 이 형상이란 외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 절에서 말한 바가 있다.  예컨대 돼지새끼는 그 어미를 닮았고, 개는 개를 닮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자로 만들었으니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이 인간은 신의 형상인 원인(原人-타락 전의 첫 사람)을 원형적인 형상이라 하는데 이 형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형성적인 원의(原義)는 없어졌으나(전적 타락) 신의 형상 자체가 전혀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즉 신의 형상과 같이 지음 받은 인간이 원인이 변질되었다는 말이니, 변질이 되었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변질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성질 자체가 변질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성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인간에게는 신의 형상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을 수가 있는 것이니 대형(代刑)을 입어 원상복구가 되고, 대행(代行)을 입어 원상복구 이상으로 그리스도처럼 의로워졌고, 또한 신의 새생명으로 연결되어 살아났으니 이제는 본질과 본성적 생명적으로 신의 자녀가 된 것이다.

신의 자녀가 된다는 이 말은 법적으로만이 된 것이 아니고 본질과 본성적으로도 되었다는 것이니 본질과 본성적으로 아버지의 본질과 본성을 닮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천하에 많은 존재가 있지만 인간 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혹은 부르는 존재는 없다.  객관적으로 부르지 못하게 해서 자기는 부르고 싶으나 못 부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못한 고로, 또 본질과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없다.

‘나 닮도록 만들자, 나 닮은 자 만들자!’  왜?  아들을 삼기 위해서!

2) 신의 신부를 삼기 위해서.(계시록, 아가서, 예레미야, 호세아)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은 당신의 애성(愛性)은 참된 애성(아가페)이니 이 참된 신의 애성은 단면적 애성이 아니고 복합적 다양적 애성인 고로 그 애성을 부어 주고 싶어서, 부어 주시기 위해서 신부를 삼는다고 말했다. 

이 복합적 다양적 애성을 우리 인간세상에서 인인 간에 주고받는 애성으로 표현을 한다고 하면 혈육적 사랑이 다르고, 우정적 상대적 사랑이 다르고, 이성적 애성이 다른 것 같이, 물론 그 외에도 애성의 성질을 구별하면 더 있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 당신에게 있는 애성은 그와 같은 단면적이 아니고 복합, 다양적이기 때문에 수애자가 그 사랑을 받을 때는 그 사랑의 느낌이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랑의 수애자로서 사랑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혈육적인 사랑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되고, 또 그 사랑을 ‘당신이여, 여보, 주여, 나의 신랑이여’ 하게 될 때에는 에로스적 사랑을 느끼게 되는 등 동 장소와 동 사건에서도 수애성이, 감정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고로 그 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이것을 성경은 아가페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자체적으로 아가페는 없다.  즉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는 말이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이 아가페 사랑을 받아서 남에게 줄 수 있으니 이것은 발생적인 사랑이 아니고 수동적이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성으로만 영원히 사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으시고 신부와 신랑의 깊은 애정의 관계를 갖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신부로 삼지 않으려면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고불변의 창조주께서 나를 당신의 신부로 삼으신 것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몰라주면 되겠느냐?  하나님의 매를 맞으면서,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면서 사랑을 느낀다.  세상 육신의 부모에게 이 사랑은 없다.
 
3) 영원한 후사를 삼기 위해서.(엡3:6)
신이 존재하고 계시던 그 신령계는 신성을 가져야 만이, 혹은 절대성 완전성을 가지신 분만이 통치 지배 사용하고 누리고 느낄 수가 있다.  신의 성품을 가지지 못한 자는 이 신령계를 통치도 사용도 지배도 누리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런고로 그 나라를 당신과 같이, 당신처럼 통치 지배 사용 누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짓지 아니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후사란 존재적 후사만이 아닌 사역적 후사도 의미한다.(사용적, 활용적) 

결론: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짓게 된 그 원인과 동기와 목적은 곧 하나님 당신의 인격에서 나온 것이니 이 인격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고 했으니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인격(형상)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인간에게 입혀주신, 그리고 입혀주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리이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사건 환경 가운데서 그 깨달은 말씀의 뜻을 따라 나의 정신과 사상을 하나님의 성품과 단일화 시켜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것이고, 성화구원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주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기독자의 재세기간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궁극교회 홈페이지:http://909.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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