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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맥 할머니 이야기 (4) - 맥 할머니를 상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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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할머니 이야기 나머지 편을 몇 번 올리다가 실패했군요.  쓰다가 잠시 어디 갔다가 날려버리고 쓰다가 또 날리고… 아휴… 4편 쓰기 힘듭니다.  

맥 할머니는 요즘 잘 지냅니다.  요즘 저와는 잘 만나지 못합니다.  소식만 듣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녀들이 마련해준 노인 아파트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여성봉사센터에 들러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삶에 이렇게 고난과 고통이 집중될 수도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눈물 흘리기도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해서 같이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되는 것이었습니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나 역시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말씀이나 기도 같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내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늘 할머니가 말하는 인생의 아픔에 대해 감탄하고 눈물 흘려주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할머니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과 눈물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으며, 사실 자신은 이런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에게  고통당해온 할머니의 삶의 역사로 볼 때 충분히 공감가고 이해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런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기대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이 스며들 조그만 공간도 없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사랑에 집중하다보니 신앙을 가졌다고는 그 신앙이 고난 중에 있는 자신에게 평강와 위로를 줄 수 있는 신앙을 아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분노로 나타납니다.  할머니의 사람을 보는 방식은 아주 심플합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자기 편입니다.  자신에게 조금의 충고라도 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면 그들은 모두 할아버지 편입니다.  이전에 상담자들이 할머니와 더 이상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고난과 고통 중에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경향성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겠습니까?  할머니에게 있어서 ‘사람’과 ‘하나님’ 중에 누가 더 큽니까?  

그것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할머니의 자기 연민입니다.  할머니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피해자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할머니에게도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할머니 또한 그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잘못은 자신이 당한 고난과 고통 뒤에 숨어 있습니다.  “니가 고통을 알어!!! 니가 삶의 고난을 알어!!!”  이런 식입니다.  할머니가 당한 고난은 그 누가 당한 고난과 비교될 수 없고, 따라서 아무도 할머니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의 크기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어떤 잘못도 보이지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자기 의(self righteousness)와 관련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와 용서의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은 늘 당해왔고 따라서 분노하고 증오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온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맥 할머니는 상담하는 것은 가능한가?  맥 할머니는 변화될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 상담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Life changing process”입니다.  삶의 변화의 가능성을 보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변화의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상담의 개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80넘은 맥 할머니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정했습니다.  할머니에게 좋은 상담자가 되기를 포기하기로 말입니다.  그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할머니의 모든 고난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로 했습니다.  상담을 포기하는 대신 관계를 얻기로 했습니다.  고국에 두고 온 비슷한 연세의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할 이야기가 거의 다 떨어지고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조차도 알게 되자 우리 만남은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비로소 할머니는 내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을 그 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때로는 포옹을 하고 기도하면서 아주 조금씩 내 마음에 있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예수님이 함께 고통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입니다.  작은 소리로 아멘~ 하는 할머니는 가끔씩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해 할머니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고난 받으셨던 주님이 결국 할머니가 원하시던 위로를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을 돌려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남은 여생을 그 행복감을 붙들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할머니와 상담하면서, 아니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사람’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지를 배웠습니다.  맥 할머니를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오랜 세월 당해온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질 대로 연약해진 그 할머니의 신앙을 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지 않으면,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 속에 자신을 몰아 넣지 않으면 매맞고 무시당하는 가운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 할머니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그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의 모습도 숨어 있지 않습니까?  다소 고상하고 다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있지만 우리 모두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사람의 사랑을 기다리며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이거 몇번 날라갔던 글을 기억해서 적다보니 엄청 길어지는군요.  

맥 할머니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할머니의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몸으로 배운 영어를 사용하는 중국인 할머니, 맥 할머니….. 정말 알아듣기 어렵지만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남은 평생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머니와 오늘까지 함께 눈물 흘리신 주님께서 우리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맥 할머니, 평안 하소서!!!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에 계신 할머니가 보고 싶은 가일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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