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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위안받으려 하지 않는 영혼(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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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한평생과 맞바꿀 만한 한 순간이 있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내가 본 것은 어떤 사람의 한평생과 맞바꾼 한 순간의 흔적뿐이었어.  물론 보고 싶지 않지.  하지만, 어쩌겠어.  바로 우리집 현관 옆인걸.  
내가 얘기했던가.  어떤 사람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남자고 나이는 삼사십 정도.  우리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이 됐다나 봐.  오며 가며 그 자리를 안 보려고 애쓰지만 그래봐야 소용없지.  
한 달도 더 지났지만 아직 흔적이 뚜렷한 걸.  
요즘 그 자리에 코스모스들이 피었어.  무슨 전설의 고향 같은 소리냐고?  그러게.
실은 바로 그 자리는 아니고 조금 뒤쪽에.  왜 있잖아.  아파트 현관 양 옆에 작은 맨 땅.  멋없는 정원수 한 두 그루 덜렁 서 있는.  그늘진 그 땅에 정말 코스모스들이 피었어.  웃지만 말고 들어 봐.
그 손바닥만한 맨땅을 자기 집 꽃밭처럼 가꾸는 할아버지가 계셔.  아주 작은 아주 마르고 아주 나이든.
아파트에서 나오는 재활용품을 팔아서 용돈을 쓰신다지.  단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과자봉지도 줍고 빈 병도 치우고 그러시지.  
윗동네에 서른 세평짜리 아파트도 갖고 있고 연금도 나오고 그런다는데.  우리 아파트 노인들 치고 그 할아버지 댁에 가서 맥주에 청요리 대접 안 받은 이가 없다니 사실일 거야.
중풍 맞은 마누라 돌보며 재미있게 살다가 재작년에 그만 혼자가 됐다는군.  그 때부터 아파트 일을 시작했다지, 아마.
참 코스모스로 돌아가야지.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지, 할아버지가 작은 땅에 철철이 꽃을 심은 거, 돌아가신 마나님 대신이 아닐까?
봄엔 금잔화, 여름엔 분꽃, 가을엔 코스모스...... 참, 올 여름엔 토란을 다 심었더라.  토란잎이 그렇게 크고 멋진 줄 처음 알았어.  땅에서 자라는 연(蓮)의 한 종류인 줄만 알았다니까.  
저런 토란잎이 마나님을 닮았나 보군.  아니지.  그런 말이 아니지.  
할아버지가 사람이든 꽃이든 끊임없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가슴을 가졌다는 뜻이지.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지지 않는 그런 사람.
그냥 살기 위하여 태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할까.  사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비천할까.  그런 의미에서 '살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있고,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는 카뮈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군.  
옥상에서 뛰어내린 그 사람, 한평생과 맞바꿀 그 순간에 누군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알베르 카뮈의 '위안받으려 하지 않는 영혼' 中 에서
                                              
                            
                                                       * 권현숙(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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