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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등골 이야기 23 -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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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팔백여 세대가 밀집해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살다보니 아직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흘이 멀다하고 이사를 오고 갑니다. 특히 자가(自家)가 아닌 세입자들은 대개 2년을 살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고, 또 요즘엔 맞벌이 부부가 많기 때문에 같은 동은 고사하고 같은 라인에서도 얼굴을 알고 지내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에서 '이사를 가면 가는가보다, 오면 오는가보다'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상 속에서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살펴주면서 살아가는 이웃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젯밤이었습니다. 모처럼 일찍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다가 아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바람에 선잠이 깨고 말았습니다. 침실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 아내는 전화 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여보세요……예…8613 맞는데요…예? 라이트가 켜져 있다구요…예…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아내의 전화 통화를 통해 사태를 파악한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시계를 쳐다보았습니다. 밤 10시 45분이었습니다.

   '아…그랬었지…" 어두움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병원에 잠깐 다녀오면서 미등을 끄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방전(放電) 됐으면 시동이나 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의 걸음은 바빠졌습니다. 우리 차가 멀찌기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미등을 밝힌 차가 눈에 시리게 꽂혔습니다. 미등을 끄고 시동을 걸어보았더니 다행히 시동이 걸렸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 차를 세워둔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길목이었습니다. 온종일 그 자리에 세워두었으니 적어도 일이백명 이상은 차에 불이 켜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보았을 것이고, 장로님이나 집사님도 보았을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이나 의사, 또는 판검사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들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던 길이었기에 빨리 들어가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등이 켜진 차를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음날 아침 겪을 곤란을 생각한 그는 캄캄한 주차장에서 애써 차에 남겨진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도 언젠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문득 지난 여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한나절, 점심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급히 차를 몰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는데 전조등이 켜진 채 주차되어 있는 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약속 시간은 다 되어가고 가랑비는 계속 내리는 상황에서 순간 번거롭게도 생각되었지만, 나는 그냥 갈 수 없어서 비를 맞아가면서 차에 남겨진 번호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려 주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고무된 목소리로 연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복했습니다.

   살다보면 도움을 주었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특히 '나에게는 절대 그런 일 생기지 않아, 내가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데…'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내 속에선 '어젯밤 우리 집에 전화를 해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자꾸만 고개를 쳐듭니다.

   사실 이 땅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또한 식견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요즘 세대가 너무 자기중심주의로 흘러간다고 우려와 자조(自照) 섞힌 말 한두 마디쯤은 할 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려와 자조 섞힌 말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머리 속에 든 성경 지식 몇 줄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건 알아 주지 않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다가가 마음의 온기를 나누는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걸려온 전화는 단순한 전화 한 통이 아니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살아가는 나의 서툰 몸짓 너머로, 어쩌면 더 서툰 몸짓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이웃들을 향해 말없이 주님의 사랑을 나누라는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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