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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주여, 나의 마지막 말이 기도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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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무의식의 삶과 의식의 삶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기도는 내 생각과 마음을, 의지와 열정을, 머리와 가슴을 이어준다.
기도야말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여금 내 존재의 구석구석에 파고 들게 하는 길이다.
기도는 내 온전함과 조화와 내적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렇다면 내 기도생활은 어떤가?
나의 기도는 좋은가? 기도하고 싶은가?
기도시간을 내고 있는가?
솔직히 세 질문 모두 대답은 '아니오'이다.

십대 때의 애틋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는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예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며 몇 시간이고 무릎 꿇곤 했다.
왜 사람들이 기도할 마음이 없는지 이해가 안 갔다.
기도는 너무 친밀했고 너무 충만했다.
그 이후로 나는 기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기도에 대해 읽고 쓰며 수도원과 기도원을 찾아다녔고 많은 사람의 신앙여정을 지도했다.
지금쯤이면 내 영혼은 기도의 불로 활활 타올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며, 기도가 내 최고의 은사요 가장 깊은 갈망인 양 내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나는 기도할 때 느낌이 별로 없다.
들끓는 감정도 없고 정신적 환상도 없다.
내 오감에는 전혀 감각이 없다.
특별한 냄새도 없고 특별한 소리도 없고
특별한 광경도 없고 특별한 맛도 없고 특별한 움직임도 없다.
성령께서 오랜 세월 내 육체를 통해 분명히 역사하셨지만 지금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고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기도가 더 쉬워지려니 기대하며 살았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인 것 같다.
지금의 내 기도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은 어두움과 무미건조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어두움과 무미건조함은 내 과다한 활동에도 일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더 바빠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를 탓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어두움과 무미건조함은 무엇인가? 나를 어디로 부르려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나의 주요과제일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생애 끝에 하나님께 버림 받은 기분을 느끼셨음을 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예수님의 육체는 가해자들에게 짓밟혔고,
정신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추스릴 수 없었으며,
영혼은 한 점 위로도 맛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로 그 찢어진 심장에서 새 생명의 표증인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내 기도의 어두움과 무미건조함은 하나님의 부재의 신호인가?
아니면 내 감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보다 깊고 넓은 임재의 신호인가?

내 기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관계의 종말인가?
아니면 말과 감정과 몸의 감각을 초월하는 새로운 연합의 시작인가?

내 기도가 싸늘히 식었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놓인 한 해는 분명히 기도의 한 해가 될 것이다.
내 기도는 분명 싸느히 식었지만 내 속의 성령의 기도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어쩌면 내 기도도, 하나님과 가까와지려는 내 노력, 하나님과 연합하려는 내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자유로이 운행하시도록 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로마서 8:15~16).

내 사납고 뒤숭숭한 꿈은
필시 내게, 내 앞에 펼쳐진 놀라운 영적 일을 계속 일깨워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헨리 나우웬의 '기도'에 대한 위의 글을 읽으며,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기도생활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담임목회를 시작한 지 어느덧 10여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이 '기도'임을 실감하게 된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기도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 시간이 내 기도생활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기도생활이 어렵다.

인간은 약하다.
목회자도 약하다.
사람마다 쉬쉬 해서 그렇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러한 우리의 약한 부분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살아 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
얼마든지 새롭게 될 가능성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바른 목적과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통로를 늘 열어놓고 사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의 목표가 점점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헨리 나우웬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필요보다는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끊임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좇음으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겸손하며 목적이 확실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갔지만 그의 고백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케 한다.

"주여, 나의 마지막 말이 기도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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