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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우리를 낳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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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교회에서 청년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집사입니다.
말을 잘 하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청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글로 쓰면 어떻게 좀 나으려나 싶어서 정리를 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써놓은 글은 좀 정리가 된 듯한데 말 할 때는 요령부득일 때가 많습니다.신통치는 않지만 정리가 되는대로 올리고저 합니다.
글로서도 도무지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면 알아서 접겠습니다.
^^;
(우선 글로서의 완성도가 좀 나은 것부터 올리겠습니다.)
            

         << 우리를 낳은 하나님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나를 낳은 것은 누구인가?

◈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곧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으니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생산됐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신도 아들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 세상에서 제일 신비한 사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에 사람이라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관적인 사실입니다. 즉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나의 몸이 존재한다는 것과 달리 '나'는 내가 스스로 의식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아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앎으로, 곧 의식함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의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의식하지 못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문득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이것은 또한 제일 황당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이 황당한 것은, 내가 이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즉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양으로, 어느 나라에, 누구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는 아무 통보도 없이, 또 협의도 없이 혹은 그렇게 태어나고 싶다는 어떤 소망도 없이 어느 날 문득 특정한 환경 아래에 태어나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내게 선택의 폭이 없이 주어진 존재입니다.

▲ 또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인지, 그렇다면 '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음이 주는 답답함에 혼란스러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라는 사람은 "내가 사는 것은 나비의 꿈속에 꾸어지는 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인간의 삶은 누군가의 혹은 하나님의 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의 헛된 망상이나 아닌가 생각하던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아무리 의심을 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는 자의식 자체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정의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꿈이든 뭐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 그러한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버거워하기도 합니다. 「나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하겠다는 소망도, 무엇이 될 것이라는 희망도 없이 아득하게 주어진 시간들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힘겨운 짐으로 인식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 더러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불만하여 부모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왜 날 낳으셨나요?"하고 불평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가 할 수 있는 답은 역시 그들의 답답함입니다. 부모들도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너를 낳았지만 우리가 낳은 것은 그냥 한 인간이지 지금의 너를 기원한 것은 아니야. 나도 너와 같은 인간이 태어날 것을 원하지는 않았어. 보낼 수만 있다면 네가 온 곳으로 돌려보내고 싶다." 아마도 우리를 낳은 것은 육신의 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 이 「사실의 세계」에서 우리는 돌려보내질 곳도 돌아 갈 곳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객관적인 사실만 존재하는 물리적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나의 실재 - 영

▲ 「영」은 인간이 그 존재방식을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나 그 존재를 물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설명은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리고 성경은 인간도 또한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진 이미지에 따라, 하나님의 모양 곧 존재방식이 영인 것같이 사람도 영이라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를 부음 받아서 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냥 영이 아니라 생령(生靈)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된 영, 물리적인 탈을 쓴 영 곧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됨으로 인간은 같은 생물인 다른 동물들과 다른 존재방식을 가진 존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 내가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임을 깨닫게 됨으로 인간은 자신의 몸을 낳은 것은 육신의 부모이지만 '나' 곧 내 영혼을 낳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조금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나'의 질료는 하나님의 질료이고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알게 됨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 이것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신 초월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를 낳으신 것이 하나님임을 알게 됨으로 삶이 황당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디서 왔는가?"하는 질문이 종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우리가 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를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

▲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다른 세계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함을 알아야 하나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자의식을 일종의 기능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세계가 세계의 전부라는 인식을 가진 경우입니다. 곧 자의식이란, 시스템이 갖는 메커니즘의 하나로 인간이라는 고급 시스템에 따른 고급한 메커니즘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시스템이 파괴되면 같이 없어지는 기능인 것처럼 인간의 자의식도 인간이라는 시스템이 동작하는 동안만 기능하는 일종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세계의 전부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갖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인정할 때에도 '기능으로서의 신'만을 인정합니다. 세계라는 시스템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신, 혹은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로서의 신만을 인정하지요.

▲ 그러나 아무리 자의식을 기능이라고 설명하더라도 그 자의식이 하필 왜 이 '나'로 존재하는지는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인 이유' 즉 '내가 왜 나인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든 시스템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사실로 보이는 시스템만 인간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나와 하나님의 질료가 같기 때문에 내가 인격적인 존재이면 하나님도 인격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내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는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믿게 되려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이 이 물리적 세계를 지어놓았지만 이 물리적인 세계에서 우리를 만나지는 않습니다. 이 물리적인 세계는 자체의 메커니즘으로 완벽하게 움직이도록 구성되어있습니다.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이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 '나'라는 인격이 실재로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의미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세계는 영의 세계입니다. 이 하나님의 세계는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아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나를 인식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젠가 저절로 알게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 하나님이 존재하심은 「그냥」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냥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계시'라고도 하고 '은혜'라고도 합니다. 물론 그 증거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증명은 아닙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이 계심이 알아지지만 확인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을 우리는 우리의 앎, 곧 믿음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 사실의 세계에서......

▲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종과 아들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종은 이르지 않으면 모르고 시키지 않으면 아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의 내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고 내 할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사람에게 하기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 곧 하나님처럼 살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산다는 것은 명령하는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낳은 자로써, 닭이 알을 품듯이 세상을 품고 키워 가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것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잘 다듬어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 대하여는 사람이 사람되게 하는 사람,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 곧 하나님께 소용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책임감'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책임감을 통해 인간은 '나만 잘 살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어야 함을 압니다. 책임감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는 느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은 또한 부모가 되고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쁨으로 그냥 하게 되는 것이고 엄마 된 이가 종일 아기만 보살핀다고 "난 뭐지?"하고 묻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엄마 된 이가 기쁨을 모르고 "내가 왜 이일만 하면서 살아야 해?"하고 묻게 되면 엄마의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게 됩니다. 아들이나 엄마의 일은 선악을 따지면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 그런데 정말 염려스럽게 지금은 사람들이 점점 부모나 자식의 일을 하지 않으려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논리가 지배적이 되고 있습니다.

▲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사실의 세계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눈을 팔게 되고, 세상에 눈이 팔리면 세상의 자로 사람들을 재고 자신을 판단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을 재단하게 됩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하나님이 안 보이는 청맹과니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함의 신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저절로 되어지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삶이 감사한 것임을 알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를 왜 낳으셨나?
예수를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

▲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성경 속에 있는 말씀을 되새겨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성경에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예수님을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된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 이 말씀은 우리가 영적인 존재인 것과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예수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만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낳으신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였고 우리도 그렇게 인식하기를 가르쳤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영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 예수는 우리가 한 형제임은 가르치고 하나되기를 종용하신 분입니다. 크리스천들의 「하나된 우리」를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은 「나」에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단위가 아니라 그렇게 의식되는 범위에서 정해지는 정신적 단위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같이 영적 단위이기도 합니다.

▲ 예수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고 말했습니다. 또한 말과 같이 자신의 친구인 제자들을 살리고 혼자 잡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인 우리는 예수가 그저 자신의 제자들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죄 없는 자신을 십자가라는 제단에 내어놓은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 곧 헌신을 통해 인간의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비밀을 열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그 증거인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남겨 놓았듯이 오늘의 우리도 교회를 지켜가려면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교회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정말 내어놓지 않고 내어놓은 척한다면 교회도 살았다고 말은 하나 실제로는 죽은 것이 될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교회 속에서 거듭난 생명을 지켜가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먹고 그의 몸 된 교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 하나님을 못 만나면 아무 것도 아닌 허망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낳은 아버지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 한 형제자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형제자매로 만나야 하나되어 같이 살아가는 참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가 하나되는 참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을 이루는 것이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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