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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참사로 끝난 자포자기 ‘복수극’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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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동아일보 2.19일자에 실린 글인데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보듬는것이
모두가 함께 사는 길임을 역설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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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

또? 이젠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최후의 순간들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찢어진다. “엄마, 문이 안 열려. 사랑해….” 휴대전화에 남은 아이의 마지막 목소리, 평생의 한으로 부모 가슴에 못 박힐 것이다. 전 국민은 아직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있는 경황이 아니다.


참으로 어이없다. 영문도 모른 채, 아무 죄도 없이 그들은 갔다. 그렇다. ‘아무 죄 없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범행이 너무도 어이없음은 바로 이 점이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은 아무런 동기도 없이 그냥 해보는, 소위 무동기 범행이다.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이 그냥 총을 난사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대개 정신병 환자거나, 아니면 중증 경계성(境界性) 인격 장애인이다. 불행히도 이들은 평소 생활은 그럭저럭 잘 하고 있어서 얼른 보기엔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끔찍한 폭발을 한다. 화약을 메고 다니는 사람이다.




▼영문도 모른채 스러져간 넋들▼


그 다음 유형이 ‘원한’에 찬 사람의 복수극이다. 요즈음 온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자살 테러는 그 전형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게 특징이며 목표도 특정 집단이다.


그러나 개인 원한에 의한 자포자기형 복수극은 특히 한국인에게 그런 경향이 강하다. 우리는 설움을 잘 타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잘못은 생각도 않고 오직 남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쉽게 설움을 타는 게 우리 한국인이다. 그래서 나보다 나은 주위 사람이 모두 미워진다.


자기를 무시하고 괄시하는 걸로 생각한다. 물론 피해의식도 가세한다. 원망을 하게 되고 이를 간다. “두고보자”는 복수심으로 불타 오른다.


10여년 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자전거들을 향해 자동차가 질주한 사건은 돈 없는 설움에서 비롯됐고, 대구 나이트클럽 방화 사건은 자기를 무시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이번의 방화는 신병과 장애로 인한 설움으로 자포자기형 동반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다. “혼자 죽기는 억울해 많은 사람과 함께 죽고 싶어서”라는 게 그의 변이다. 그로선 이상 더 버틸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온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원망스럽다. 병은 깊어가고, 살긴 더 힘들어지고, 그에게 우울증은 필연이다. 누구도 자신의 딱한 사정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아무리 외쳐 봐야 소용없는 무력감, 가족에게 더 이상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고, 이제 남은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원망스러운 세상 “너 죽고 나 죽자”는 게 그가 한 최후의 선택이다. “나를 좀 알아줘, 나를 좀 봐 달라”는 참으로 절박한 절규다. 물론 여기엔 한국인 특유의 응석 심리도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정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메아리도 없는 소외감에 그는 절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심리 저변엔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대변하는 의미도 있다. 물론 이런 심리는 테러에서처럼 강렬하진 않다. 테러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확신범의 일이다. 이들에겐 나름의 당당한 논리가 있다. 물론 이번 사건을 그런 시각에서 보긴 힘들지만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런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 이후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건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우리 마음 자세다. 우리의 무관심이 이 사건을 만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범이라는 양심의 소리다. 좀 더 따뜻이, 사랑으로 감싸 안고 장애인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털어야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있었던가.


사람이 모이는 곳이 어디 지하철뿐인가. 그런데도 범행 장소를 굳이 지하철로 잡은 것도 장애인의 바탕에 깔린 심경의 표현이다. 장애인에게 지하철은 그림의 떡이다. 설계에서부터 약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인색하다.


▼약자의 설움 방관해 온 사회▼


한국 사람은 설움을 잘 탄다. “너는 너고, 나는 나고” 하는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에선 ‘설움’이란 말도 없고 개념조차 없다. 또 설움을 준다고 타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설움덩어리다. 우리가 나보다 못한 이웃에 관심을,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것이 설움에 겨워 원한에 쌓여 저지르는 복수극을 예방하는 길이다. 전국의 부모들에게 다시 한번 부탁드리자. 아이들에게 인성교육, 인간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건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키워야 한다.


지난번 서울대의 연구보고는 충격적이다. 우리 20세 남자의 45%에서 인격의 이상 징후가 있다는 것이다. 상식으론 납득이 안 가는 범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의 대부분이 이들 인격 결함자의 소행이란 사실을 명심하자.


이시형 사회정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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