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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나의 진리실험이야기> 사람이 세상을 잘 산다는 것은(궁산교회, ‘활뫼지기’님을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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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산교회당

          
  
<나의 진리실험이야기> 사람이 세상을 잘 산다는 것은(궁산교회, ‘활뫼지기’님을 만나고....)?

196명! 대구지하철참사에서 확인된 희생자의 수입니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과연 물질문명의 발달이 인류의 진보이겠습니까, 퇴보이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을 잘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참사로 걸프전 때 미군의 희생자보다도 더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한편에서는 TV 오락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요즘에는 ‘사람’이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홍수입니다.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났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습니다.
얼마 후면, 그 대구지하철의 참사는 까맣게 잊어버릴 것입니다.
모두 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거리에 차들은 무엇이 바쁜지 쏜살같이 달립니다.
신호를 무시하기도 하고, 차와 차 사이를 곡예 하듯이 빠져 나갑니다.
무엇 때문에 분주한지, 사람들은 온 거리를 가득 메우며 걸어 다닙니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뒤질세라 정보를 얻기에 눈이 붉어져 있습니다.
책을 뒤지고, 학원을 쫓아다니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합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조차 바쁩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 학원, 저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정월 대보름의 보름달의 얼마나 밝은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추위를 이기고 터쳐 나오는 매화꽃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사람들......
달래, 냉이, 씀바귀의 때가 언제인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저 사람이 이룬 물질문명에 갇히어 살면서 모두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포자기하여 부랑아로 떠돌기까지 합니다.

궁산교회, 박종훈목사님!
그런 세상의 풍조와는 다르게 사는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여 안달인데, 목사님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고 계신 듯 했습니다.
언젠가 그곳을 지나쳐 간 일이 있었지만, 갈릴리 마을을 통해 목사님을 뵈옵고, 꼭 그곳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앞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뒷산이 있는, 양지바른 곳에 궁산교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낯 설은 방문객을 발견한 떼까우(거위의 전라도방언)가 꽥꽥거렸습니다.
목사님 가족이 출타 중이었지만 우리는 주인이 없는 교회당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갔습니다.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는 듯했습니다.
교회당은 도시에서 잔뜩 멋을 부린 카페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이리 저리 뛰어 다녔습니다.
예배당에 있는 모든 나무 붙박이 장식, 교회당 마당의 잔디, 디딤돌 하나, 하나가 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예술품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목사님의 예술적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떤 설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구하게 된 재료에 맞추어 건물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태풍에 쓰러진 당산 나무를 베어서 사용하기도 하고, 오래된 건물 철거하는 곳에서 나무를 얻어 오기고 하고, 땅을 파서 얻은 돌과 흙을 사용하여 교회당을 지었답니다.
큰 나무의 그루터기로 만든 강대상은 참으로 명품이었습니다.
저는 부러워하며 강대상에 서 서 폼을 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강단의 양옆에 있는 야긴과 보아스(두 기둥)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 건물의 높이(상당한 높이)에 꼭 맞는 나무를 예비해 두셨는지 말입니다.
놀랍게도 그 건물은 3층의 건물이었습니다.
1층은 본당 2층은 내려다보면서 함께 예배할 수도 있는 교육관인 셈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이나 예수원의 아름다운 창이 있는 방을 연상케 하는 3층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이 가족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목사님은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따라 다니며, 무슨 견학이라도 온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어지간한 목수의 연장보다 더 많은 건축용 연장 창고도 보여 주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사모님은 그냥 가겠다는 우리를 붙잡고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들처럼 정답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농촌마을은 갈수록 고령화되어 갑니다.
사람들은 아이들 교육이니 뭐니, 문화적 혜택이니 뭐니, 핑계를 대면서 도시로, 도시로 떠나갑니다.
그러나 세 아이를 둔 목사님은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을 잡으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하며 밝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가족과 함께 ‘보라! 농촌이 오히려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곳이다!’라고 시위라도 하듯 잘 살고 계셨습니다.
돈이 풍족하다고,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궁산교회, 활뫼지기 목사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잘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을 떠나올 때 아이들은,
“우리 이곳에서 자고 가요!”
“우리 이곳에서 자고 가자!”
“우리 이곳에서 살아요!”
이러더니, 지금은
“우리는 언제 그런 교회지어요?”
“우리도 그렇게 지어서 살아요!”하면서 지금까지도 보채고 있습니다.

  

          
順天바람직한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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