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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꼭 봐!는 꼭좀 봐주세요의 준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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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돌아가자

진정한 종교개혁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종교개혁을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나 문제가 많다. 한 나라의 교회가 문제 많은 것을 떠나 신앙의 타락은 온 나라의 모든 사회 문화 각 방면에 영향이 미치는 근본이라는 측면에서 오늘의 이 같은 문제를 그냥 보고 있을 순 없기에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회의 회복은 곧 사회와 문화 등등 모든 이 땅 회복의 시발과 초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문제 해결의 방법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예배의 회복이다. 요즘 자주 언급되는 진보와 보수라는 신학의 조류로서 말한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과감히 보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보수가 적어도 성경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쓰인다면 보수로 돌아가는 것이 이 땅 회복의 길이라 생각한다. 즉 근본으로 가는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했다 .이미 교회개혁이나 회복의 방법 및 길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을 기대할 것이 없다. 방향은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시되어 있다.

새로운 획기적인 한국교회개혁 회복의 방법이 나왔다고 해봐야 인간의 방법과 생각들이 나올 뿐이다. 그런 것은 진정한 교회회복의 방법이 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심히 이탈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단을 잘못하여서 진보적인 사상이 없어서 한국교회가 오늘날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진보사상이 없어서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보수적 한국교회이든 진보적 한국교회이든 성경에서 이탈한 것이 오늘날의 타락을 만든 원인이다.

그렇다고 진보와 보수를 적절히 혼합한 것이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정신인 것도 아니다 성경은 보수도 아니면 진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보와 보수가 혼합된 양상도 아니다.  그러나 굳이 쉽게 설명을 하기 위해 보수를 성경에 철저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애석하게도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그 보수가 성경을 말씀대로 따르는 것을 뜻한다면 말이다. 한국교회는 보수적이라기 보다는 교권적이고 권위적이며 수구적 성향이 강하다. 그러함에도 오히려 자신들이 성경의 말씀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보수를 운운하며 보수의 의미를 왜곡하여 사용했던 면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정통적인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보수적 경향이 강했고 그 안에 진보정신이 결여되어서 오늘날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장로의 유전과 전통을 보수라는 명목으로 수호했기에  오늘의 문제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것의 치료가 진정한 보수의 회복이 아니겠는가!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치료를 할 수 있다. 결국 철저한 보수는 바른 진보정신과도 만나게 되는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회복의 방법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뿐이 없다. 초대교회의 신앙을, 즉 첫사랑을 회복하자는 것뿐이 없는 것이다. 계시록의 말씀을 상기하자. 성경과 거리가 먼 한국교회 보수를 치다가 자신도 그들과 같이 성경과 거리가 먼 진보의 한계성에 부딪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양극단으로 치달으면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싸우는 꼴이며 주님이 보실 때에는 똑같은 자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자신이 공격하는 상대의 모습이 양극적 차원만이 다를 뿐이지 결국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오늘의 한국교회타락의 원인을 장로의 유전과 전통을 성경처럼 수호한 것에 두지 않고 단지 진보사상의 결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이것은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 진보라는 것이 심히 주관적이고 사실 오늘날에 진보라는 정의가 성경에 꼭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국교회가 보수적이며 근본주의 적인가! 사실 신앙을 말할 때 근본적이라든가 보수적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붙들림 바 되어 있고 성경에 입각한 신앙은 그 어떤 주의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입각한 사람에게 무슨 보수와 진보가 필요한가! 예수님이 이 땅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시는 것처럼 , 바울이 자신의 지식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는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신앙 안에 바로 입각해 있다면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도 다 무의미하다. 그렇게 볼 때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수적이고 근본적인데 문제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적어도 보수가 성경에 철저한 입장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면 한국교회는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 즉 철저히 더욱 보수적이 되는 것뿐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그 보수의 의미가 오늘날의 교회기득권의 전통과 유전을 수호하는 의미로써의 보수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철저하다는 의미의 보수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다.

결국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굳이 보수와 진보로써 설명한다면 철저한 보수는 진보와도 만나게 된다. 결국 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고 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기 때문이다. 먼저도 밝혔듯이 비록 그 용어는 쓰여지고 있지만 성경 안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의 보수,  진보라면 그 둘은 결국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보수의 문제와 진보의 문제뿐 아니라 이단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방향성이다. 진보적 이단도 있으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에는 진보나 보수의 맹점뿐 아니라 이단의 비 성서적인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분별이 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보수가 성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수구 기득권유지를 위해 악용했던 것처럼 오늘의 진보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른다는 명목 하에 잘못하다가는 단지 윤리적 도덕적 외침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보수의 문제, 진보의 문제, 이단의 문제, 윤리 도덕의 문제 등 모든 것을 초월하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성령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철저한 보수가 무엇인가! 다음 제안하는 글은 도저히 보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난 과감히 다음 제안이 보수중의 보수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한국교회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전통을 지키는 수구였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다음 제시하는 항목은 그러기에 진보적 시야라고 하기보단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한국교회가 회복되기 위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항목을 제시한다. 즉 진보를 말하기 전에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며 복음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선행 되어야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선행이라 기  보단 복음을 바로 아는 것 자체가 진정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의 문제는 진보든 보수든 어느 한쪽 편을 드는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즉 혈과 육의 인간의 편가름의 문제가 아니라 공중권세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의 문제이다. 전반부는 주로 교리 적인 회복을 말했고 후반부는 주로 실천적이 부분을 강조했다. 복음은 사상적 회복과 실천적 기준 또한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의 회복을 전제한 윤리 도덕적 회복을 외쳐야지 복음적, 교리적 기준 제시 없이 윤리적 도덕적 회복에 대한 제안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즉 교리적 복음회복이 윤리, 도덕적 회복보다 먼저 한다는 점이고 실제 복음의 회복은 자연스러운 윤리도덕의 회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1. 예배에 있어서 율법의 틀을 벗어라. 주일성수는 없다. 일주일 내내 중 자유롭게 모인다. 새벽예배는 없다. 신학교라는 틀은 없다. 목회자는 꼭 신학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신학교라는 인간의 틀을 따를 때만이 사역의 공인성을 인정하는 병폐를 버려라. 사역자는 하나님이 성도의 감동에 따라 교회자체에서 세우는 것이지 신학이라는 울타리에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의미를 교회건물 내로 한정, 축소시켰다. 교회당으로 모이는 것이 예배가 아니고 교회로 모이는 것이 예배이다. 즉 교회로 모이는 것과 주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또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알려준 예배의 의미는 협소하지 않고 매우 포괄적이다.

2. 안식일과 주일은 다른 것이다. 주일을 안식일과 같은 의미로 해서 주일성수라 하여 성도들을 얽어매는 목사님들의 설교는 바꿔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은 주일성수가 아니고 모이기에 힘써라 이다. 안식일 성수는 성서의 하나님 말씀이나 주일성수란 인간의 전통이고 장로의 유전이다.

3. 자유롭게 모일 수 있도록 일주일 중 수, 금, 일요일로 제한하지 말라.

4. 예배의 주가 설교인 것을 바꿔라. 예배의 주는 찬양이 될 수도 있고 기도가 될 수도 있고 교제가 될 수도 있다.

5. 새벽기도를 꼭 실시하는 틀을 버리고 저녁모임으로도 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라.

6. 보이는 예복과 성의 그리고 제단이 핵심은 아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가짐 그리고 헌신된 마음이 예복과 성의 그리고 제단의 핵심이다.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이 무슨 벼슬이나 한 것 같은 강대상 신성주의를 버려라. 우리의 제사는 영적 제사이다. 교회건물을 성전이라 한다. 심지어 대중의 그리스도인을 상대한다는 기독교 관련 방송까지도. 그러나 사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전의 핵심이다.

7. 목회자의 말에는 반론도 못하는 가부장적인 교회 행정을 바꿔라. 프리칭(설교)은 은사를 받은 평신도가 할 수 있다. 일반 평신도에게도 프리칭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8. 할 수 있다면 목사는 직업을 갖고 열심히 자비량으로 섬긴다. 교회를 지나치게 교파나 교단의 영향력 하에 두지 않는다.

9.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적 설교를 배척한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의 바른 운영이 없이 목회자의 위상도 바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 사역자를 배출하는 신학교가 바로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10. 서로 사랑하라는 삶을 실천한다. 외형적인 것으로(술, 담배등)성도를 정죄하지 않는다. 술, 담배의 규제가 먼저가 아니라 신앙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절제가 먼저이다.

11. 십일조 등으로 성도의 신앙을 판단하지 않는다. 십일조는 강조할 수 없다. 십일조, 주일성수로 성도를 정죄하나 이런 것으로 자유한 성도를 정죄할 수 없다.

12. 교회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커질 것 같으면 지역의 개교회로 계속 분리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와 성도 , 성도와 목회자간의 유기적 교제와 나눔이 풍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13. 기도를 하나의 형식적 틀로 주입시키지 않는다. 늘 기도하는 삶을 산다. 공중기도가 아닌 이상 기도는 남이 보이게 하는 것보다 골방에서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14. 목사가 구약의 제사장이라는 교권의 권위주의를 내리고 겸손히 성도를 섬긴다. 교회행정은 전 성도가 모인 자리에서 교인 전체의 의견을 수렴한다. 목사 일인 집중교회 시스템을 버린다. 모든 성도가 다 같이 초점이 맞춰지도록 한다.

15. 어떠한 사상에도 혼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유지한다. 타종교 물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으로의 영적 싸움은 진정한 영적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인간적인 저항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닌 신앙의 지조로써 세상과 싸운다. 타인이나 남의 공격에 신앙으로 대응하라. 육적 방어는 세상의 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16. 교회 출석하면서도 가정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가정으로 모이는 것을 활성화시킨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도록 교회당 울타리 안에만 집중된 기형적 신앙관을 배격한다.

17. 성경에서 이탈한 이단이 무엇인지 교권적 교파적 이해관계로 판단하지 말고 성경에 입각한 냉철함으로 판단한다. 이단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무조건 경계가 아닌 신앙의 훈련을 통한 성숙함으로 능동적으로 이단을 경계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한다.

18. 핍박을 각오하는 삶을 산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에 따른 직업을 선택한다.

19. 세상에서 부하든 재물이 많든 적든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힘을 기울이고 모든 재물이나 권세는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

20. 목사의 임무는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서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돕는 자이지 궁극적인 영에 양식을 공급하는 자가 아니다. 영의 양식은 주님이 주신다.

21. 설교가 예배의 모든 것 인양 예배가 곧 설교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의 운행 가운데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라는 하나의 양식만을 고집할 순 없다.

이와 같은 항목은 결국 복음을 바로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다. 이 항목들은 인간이 취해야 할 항목이라 기보단 복음 안에 있다면 자연히 성취되는 성도의 자연스러운 열매들인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보수신앙의 특징인 기도를 아무리 해도 그리고 진보신앙의 특징인 개혁정신이 투철하다 해도 즉 보수와 진보의 장점을 고루 딴다고 해서 성경에 입각한 사상이라고 말할 순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기도를 잘하고 개혁적이라고 해도 그 신앙관이 성경에 맞는지 점검해야 한다. 기도 잘하는 것과 개혁적인 것이 성경사상의 모든 바른 흐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많은 부분 성경에서 이탈한 사상과 행동을 갖고 있다면 그가 기도와 실천이 삶에 함께 나타난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기도와 실천이 있어도 성경에서 이탈할 수 있다. 이단도 그와 같이 기도 잘하고 실천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기도에 소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이탈하는 즉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소홀히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의 영성과 제도적 개선이 같이 간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이탈하면 문제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에서 이탈하지 말자 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되는데 그것은 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하나하나 알아가고 삶에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험난한 영 육간의 성숙의 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 아닌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유일한 교회 회복의 길이다. 천하에 이 방법 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인간이나 교회 회복의 길은 없다. 끝으로 명심할 것은 이 글은 어느 쪽으로의 편가르기도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의 편이 아니라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진정한 종교개혁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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