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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고난입니까? 기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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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상 적들은 쾌락 주의자야.
   금식, 철야 기도, 심지어 순교나 십자가까지도
   모두 고통을 가장한 기쁨일 뿐일세.
   마치 해변에 찰랑이는 파도와도 같은 것이지.

   하지만, 저 깊은 바다에 나가 보게.
   그들의 바다에는 기쁨이 충만하게 있다네.  
   우리가 그의 왼손에 고통을 줄 때,
   그의 오른손에는 ‘영원의 기쁨’이 넘쳐나게 된다네.
  
   그러므로, 인간에게 직접적인 고통이나 고난을 주는 일에 대해
   자네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네.  
   전쟁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총알이나 폭탄이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우리의 분명한 목표는  
   그사람이 믿음을 잃고 타락하는 것이지,
   지금 그대로 믿음을 가지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C.S.Louis 는
그의 저서 “악마의 편지”에서
성도의 신앙을 빼앗기 위해서
과연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악마들끼리 주고 받는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에서 한 악마는
성도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주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악마는 다른 악마에게
성도를 고난과 고통으로 위협하기보다
염려와 근심으로 타락시킬 것을 권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언제나 고통과 고난이 있는 곳에서
아름다운 믿음의 꽃을 피워왔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 너머에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넘쳐나고
그 고난 깊은 곳에
주님과 함께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만족하고 안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평안하고 안락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스스로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세기 성도들의 고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쉬운 삶을 살면서
나는 정말 깊은 고난 가운데 살고 있다고,
내 고통만한 고통이 또 없다고
울부짖고 원망하고 서러워하며
스스로 조금씩 자신을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도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기를 원하는
오늘날 사탄의 전략이
연약한 우리의 삶에서 충만히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
그 고난을 나눔에 대한 감사,
내 삶에 채워지는 하늘의 사랑을 만나는 삶.....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에 있었던 그 기쁨의 증거들을
내 삶에서 만나고 싶은데 말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일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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