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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신고합니다! - 울음과 눈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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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제 얼굴이 갈릴리 사진관에 등장하였습니다... 짝짝짝)

          
울음과 눈물에 대하여

해 어스름녘 퇴근길, 한 아이가 섧게 목놓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직 내게는 아이들 울음소리만큼 여린 가슴을 뒤흔드는 소리는 드물지 싶다. 짐작컨대 제 엄마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매를 맞았거나 아니면 무슨 실수로 몸에 상처를 입고 그리 울고 있지는 않은지? 적이 염려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아이들 울음소리는 당연하고 울고 웃으며 커 가는 것이 본연의 모습인데도 왠지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듣노라면 짐짓 귀 기울여지고 무슨 연유로 우는 것인지 나름대로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는 쾌활하지 못하고 다소 우울한 나의 유년기였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긴 하지만, 이보다는 그 '울음'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상념(想念)에 쉬이 젖어든다고 해야겠다.

사내 아이 둘을 키우며 나는 때때로 마뜩찮은 아이들의 행동을 나무라며 더러 매를 들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소리 높여 우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내게도 적지 않은 아픔이 되었던 것은 그 '울음'에 대한 나의 오랜 번민이기도 하다.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고 이번만은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리라 작심해도 잘못을 빌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그만 나 자신도 한없이 작아지고 슬퍼졌던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연민의 감정이겠거니 하고 애써 자신을 추슬러 보기도 하지만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적어도 그 날 저녁만은 내가 아픔을 준 만큼이나 뒤섞이는 감정의 굴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컨대 사람이 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비로운 일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우는 것이니 예사롭게 본능이라는 말로 그 '울음'을 단순히 설명하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람의 눈물은 정녕 보통 눈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사람이 겪는 슬픔과 아픔, 혹은 기쁨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의미 그 이상의 작용이다. 흔히 울음(눈물)은 감정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catharsis)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눈물의 의미를 보충할 수는 있을지언정 본질로는 미흡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유독 눈물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무렵, 그 때가 내게는 암울한(?)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낱 싱거운 고민 거리에 불과하지만...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내 스스로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이다. 그 때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불꺼진 고향 교회 마루바닥에 엎드린 나는 기돗말 대신 연신 뜨거운 눈물만 쏟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울음을 존재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존재는 행복한 것이기에 그 울음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면 너무 역설적인 주장인가. 하지만 굳이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생애가 여유롭다는 뜻일 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찾아온 존재에의 위기, 그 순간이야말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고 그 뜨거운 액체가 두 눈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 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존재에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는 행복한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더러 사람의 마음속에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와 증오심, 자기 몸을 불사르고 싶은 자기 소멸감,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길 기대하는 공포심 등이 엄습할 때가 있다.
안온하고 안락하고 넉넉하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우리네 만족한 삶을 꿈꾸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인가? 누구나 위기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 닥쳐오는 그 위기 속에서 울음(눈물)으로 인하여 오히려 파멸이 아닌 존재에의 기쁨을 누리는 생의 전환점이 된다면 위기는 오히려 찬란한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울음'은 자신이 스스로 울어버린 자의적 눈물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누군가 울게 만들었다는 타의적 울음으로 이 울음의 본질을 결론짓고 싶은 것은 울게 만든 그분이 워낙 눈물이 많은 까닭이다. 눈물 많은 그분은 과연 누구일까? 나는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지으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으시다"

      - 김현승의 詩 '눈물' 중에서.


* 다음 사이트로 오시면 다른 컬럼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column.daum.net/daman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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