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바울을 통해 배우는 목회자의 영성

첨부 1


          
前 나사렛 대학교 신약학 교수였고, 지금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훼잇빌한인장로교회에서 동사목사로 사역하고 계신 유승원 교수님의 소논문입니다.
참고로 교수님을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복음과 상황"을 통해 지면으로 알게 된후 글팬이 되었습니다.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학구적인 글에 자신의 신앙고백이 담아 생동감과 호소력을 겸비한 좋은 글들이  http://swyu.com.ne.kr/index.html 에 가시면 접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 역시 목회자를 대상으로 쓰신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이라 생각되어 올립니다.
샬^^^롬
****************************************************************

당신을 위한 삶, 너를 위한 죽음/
바울을 통해 배우는 목회자의 영성

1. 괜찮았던 한 바리새인의 이야기

2.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다시 작성한 손익계산서

        그리스도의 스캔들 짊어지기

3. 타자지향적 사역자의 주체성

        나는 학자가 아니라 목회자

        소명이 삼켜 버린 자아와 주관

        빚꾸러기가 되어

4. 십자가와 성령

        뜨거운 남자 바울

        약한 것 자랑하기

1. 괜찮았던 한 바리새인의 이야기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항상 회심하기 전과의 대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새 것'을 경험하는 삶의 전환을 포함한다(엡 2:1-10). 특히 바울은 급격한 변화를 통해 '이전'과 '이후'가 꽤나 명확하게 구분되는 인물이다. 오늘날 이러한 회심은 대체적으로 부도덕하고 무의미한 허송세월을 보내다 진리를 발견하고 난 뒤 거룩하고 보람 찬 인생을 살게 되는 영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전형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 그 전환의 성격이 통념의 간증과는 다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

유대인으로서의 육신적인 정통성을 역설하는 부분은 별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좋은 유대인 집안에 태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율법과 관련해서 과거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아무리 수사학적인 요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누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이르기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amemptos)"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점과 흠이 없는 제물의 순결을 떠오르게 하는 표현이다. 로마서 7장을 바울 개인에게 적용시켜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괴로운 양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이 구절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가 자신을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하는 바가 함축한 의미도 크다.

   바울과 동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을 극찬하고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 종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심지어 그들이 왕이나 대제사장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그들은 즉시 신용을 얻는다(「유대고대사」, 13.288).

그것은 그들의 율법 해석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대로 바로 지켜 행하는 것으로 일반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 드릴 때나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바리새인들의 지시에 따라서 행했다. 바리새인들은 말과 행동에서 온전한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큰 신뢰를 주고 있었다(「유대고대사」, 18.15).

오죽하면 그 땅의 지배계층에 속하고 실질적인 지도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도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바리새인들과 별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최상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실제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성취하지 않는다. 그들이 관리직에 취임할 때에는 언제든지 바리새인의 방식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유대인들이 그들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유대고대사」, 18.17).

   이렇게 바울은 그 시대에 살던 사람으로서 바리새인이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점수를 따기에 충분한 인격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 덧붙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표현을 하는 교만과 겸손의 문제를 넘어서 그가 진짜 '성결'(holiness)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간증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울의 영성은 우선 괜찮았던 한 바리새인의 성결을 향한 열망과 헌신이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도 계속 이어짐으로써 조각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핵심을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롬 15:16) 하는 것으로 보았듯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그의 삶이 순결한 제물이기를 소원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사명자로서 할 일을 다하면서도 스스로를 두려움으로 돌아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 조신한 자세를 취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하나님께서 내게서 원하시는 것은 나의 업적 이전에 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내 노동의 결과를 대단하게 필요로 하겠는가? 목회자로서 수없이 많은 가시적 업적을 남기고 나서 정작 나 자신이 '순결한 제물'이 못 된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설사 다른 모든 일들에는 실패했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순결한 제물의 한 생애를 산다면 기실 그것이 성공이 아니겠는가. 바리새인이 비난을 받지만 순수한 바리새인의 의에 대한 정렬과 헌신은 우리가 추구할 바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1)는 예수의 말씀을 새롭게 되새긴다.

2.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다시 작성한 손익계산서

   그리스도를 만난 뒤 바울은 인생을 놓고 손익계산서를 새로 짰다. 예수의 제자들은 셈에 밝아야 한다. 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하던가. 누가복음이 기록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제자들은 주판알을 잘 굴려볼 것을 요청 받는다(눅 14:25-33). 망대를 세우는 사람이 예산을 잡아보고 시작하듯이, 적을 만난 임금이 화친과 전쟁 중 어느 것이 더 유리한가를 엄밀하게 따져보아야 하듯이 계산을 잘 해 보라. 모든 것을 버려 주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이 사실은 아주 계산에 밝은 현명한 투자라고 강변하셨다(눅 14:33). 바울도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렇듯이 계산을 다시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kerdê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zêmia)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7-8).

   '케르데'(이익)나 '제미아'(손실)는 지극히 상업적인 용어들이다. 과거에는 '케르데'에 속하는 것들임에 틀림이 없었던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인종적 순수'나 '율법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자기 의'(빌 3:5-6)가 그리스도를 얻는데 방해가 되었었기 때문에 돌이켜 보니 실상은 '제미아'가 되어서 대차대조표의 좌변에서 우변으로 넘어간다. '의'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의'는 좋은 것이며 그것은 일생 하나님 앞에서 추구해야 할 덕목이며 목표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라도 그리스도를 얻는데 방해가 되면 그것은 오히려 큰 '제미아'라는 고백이다. 얼마나 심각하게 손해가 되는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dia pisteôs christou)1)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b-9).

그리스도를 얻는데 방해가 되면, 그리스도의 지식을 갖는데 장애가 되면 그것은 뒷간에서 발견하는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렇듯이 바울의 기준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에 순기능하면 무엇이든지 '케르데'이고 그리스도에 역기능하면 무조건 '제미아'이다. 바울의 영성은 그리스도가 정의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평가된다.

   그는 한 때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정통 유대인이었으며 쓸만한 바리새인이었다. 자신이 나가는 방향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줏대 있는 사람이었다. 워낙 믿는 바가 강해 신념대로 실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 속에 뛰어드는 운동가였다. 자신이 보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적극적 실천에 뛰어들어 하나님의 적인 교회의 운동을 분쇄하려 했다. 피켓팅으로는 부족하여 반동분자들을 적극적으로 타도하기 위한 물리력 행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확신범이었고 이데올로그였다.

   그러한 확신의 골수분자가 방향을 틀게 된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었다(고전 15:8-10).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었다(갈 1:12). 바로 그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바울 속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셨다(갈 1:15). 그래서 바울의 회심은 '종교적 개종'이라기 보다는 '사명을 위한 소명'이었다. 그는 믿는 하나님을 바꾸지 않았다(개종). 그는 자신이 믿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입었고 오도된 확신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았다. 나무에 달려 죽었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예수였다(갈 3:13, 신 21:23). 율법에 정통했다는 바리새인으로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구원의 그리스도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유대인인 바울에게는 '스캔들'(거리끼는 것=skandalon)일 뿐이었다(고전 1:23). 그러나 십자가의 원리야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기묘한 하나님의 지혜였다(고전 1:24).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었다(롬 3:25).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 2:2).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스캔들 짊어지기

   바울의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이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는 유대교의 영성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혹자들이 바울의 종교를 예수의 종교와 대립시키면서 전자가 후자를 망가뜨렸다고 하는 것은 근거 희박한 주장이다. 바울에게는 소위 현대적 구분인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긴장이 없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 이전에 육성으로 교훈을 주신 예수이시다(고전 7:10; 11:23-26). 그리스도교의 목회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역할이 존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기독론적 고백과 기독론적 사역을 배제하는 목회자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모순에 빠진 사람들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적지 않은 그리스도교 목회자들은 기독론을 얼버무리거나 무효화시킴으로써 복음의 스캔들을 짊어지지 않으려 한다.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기독론 없는 기독교는 언어 자체의 모순이며 어폐이다.

   '예수의 스캔들'은 어찌 보면 소위 복음주의자가 짊어져야 하는 스캔들이다. 인간 예수는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과 함께 불리는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고백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스캔들이고 헬라인에게 미련한 것만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을 수용하는 적지 않은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게도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스캔들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아무래도 수용하기 힘들다. 그냥 인간이었던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길로 고백하는 독선의 문제가 쉽게 풀린다. 그래서 신앙의 그리스도는 배제되고 재구성된 역사의 예수는 운동가와 스승으로 그들 곁에 남는다. 신앙의 그리스도만 배제되면 유교와도 연합할 수 있을 것 같고 불교와도 가슴 터놓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가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굳이 유대교와 원수를 질 일도 없는 것 같다. 아니 구원과 심판의 분기점으로 제시되는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만 없다면 세상에 가득 찬 온갖 이신론(理神論), 범신론(汎神論)과도 수월하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구속의 메시지를 담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정말 심각한 스캔들이다. 그리스도의 특수성과 유일성은 이 찬란한 다원주의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고립시키는 울타리이다. 이른바 '복음주의자'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논의의 틀에서 볼 때, 복음주의자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스캔들을 짊어지는 사람들로 정의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가이사랴 빌립보(막 8:29)를 자기 정체성의 기지로 보수하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우리는 그냥 종교인이다. 아니면 우리는 그저 막연한 유신론자들일 뿐이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입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세계를 변혁해 나가는 복음주의자들은 압박하는 다원론과 상대주의의 세계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스캔들을 기꺼이 끌어안으며 즐겁게 짊어진다(고전 15:1-4).2)

   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 없으면 바울이 없을 만큼 그의 영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정의되고 그리스도로 인해 조각된다. 자신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 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다(갈 2:20). 그는 그의 편지 모두에서 매번 밝히듯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포로가 된 사람의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인간은 무엇엔가 사로잡혀 산다. 우리의 영성은 무엇에 사로잡힌 영성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잡혀서 살고 있는가? 무엇에 사로잡혀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가? 교인 수의 포로? 사람들의 칭찬의 포로? 나의 영광과 명예의 포로? 개인적 성공의 포로? 사회적 압력의 포로? 아니면, 생존과 물질의 유혹의 포로?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야 할 것이다. 다른 아무 것도 나를 붙잡고 늘어지지 못하게 하라.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잡혀서 살고 그것만 잡으려고 좇아가던 바울을 교훈 삼아 본다.

3. 타자 지향적 사역자의 주체성

   나는 학자가 아니라 목회자

   바울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왔다. 그것은 신학의 재료(source)가 된 그의 편지들 때문이다. 절구 하나 표현 한 마디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이해되는 성서관으로 해서 바울의 편지들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조직신학 논문이나 만사를 재단하는 법전으로 오인, 오용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네 같이 책상에 앉아 머리로만 고민하며 글줄을 뽑아낸 학자나 문인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사역과 교회로 꽉 들어차 있었고 문제가 생기고 필요만 발생하면 언제든지 뛰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편지는 자신이 그곳에 갈 수 없어서 방문을 대신하는 차선책으로 썼을 뿐이다. 위르겐 벡커의 말을 들어본다.

다가오는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기대하고 있던 자신의 실제 사역으로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교회들에 대한 일 그 자체였다(살전 2:1, 9-12, 19-20; 고전 3:5-17; 9:15-23; 15:10; 갈 1:16; 3:1-5; 롬 1:13-14; 15:14-29 등). 사도로서의 그의 과업은 교회들을 다루는 것이었지 편지를 쓰는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믿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지 편지를 쓰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죽은 후 대부분 그의 교회들은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엉뚱하게도 그네들을 위해서 쓴 편지들이 기독교 정경의 핵을 이루게 되어 수세기에 걸쳐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영향력의 역사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이 안다면, 그 자신 깜짝 놀랄 것이고 아마 당황스럽기 조차 할 것이다(Paul, Apostle to the Gentiles, 9, 필자 역).

      바울의 편지들은 예외 없이, 특정상황에서 특정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 고민하는 한 목회자가 일단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보낸 혈과 육이 살아 숨쉬는 생생한 목회현장의 글들이다. 당대의 세네카나 키케로처럼 문학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여 보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글들이 결코 아니다. 그가 편지를 쓴 것은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교회였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8). 그가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이었고, 오직 교회를 바로 세워 하나님께 이방인들을 산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일념이었다(롬 15:16).

   소명이 삼켜버린 자아와 주관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였다. 바울은 작가가 아니라 사명자였다. 바울의 명함에는 '목회자'라고 새겨져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은 그의 아이덴터티를 규정한다. '바울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가 사역자였다'는 대답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역이 삶을 정의한다. 그랬기에 사도행전은 바울의 밀레도 고별설교에 이런 고백의 기사를 담는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에 따르자면 바울의 생명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들에게 있어 사역은 생명의 방편이거나, 소명이 삶을 보람되게 하기 위한 결단인 경우가 많다. 사실 그 정도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이상의 표현을 한다. 사명이 생명을 먹는다. 소명이 삶에 우선한다. 소명이 이루어진다면 생명은 없어져도 좋다. 사명을 달성한다면 삶은 포기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의 자기 정의(定義)는 타자지향적이다. 타자성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주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임' 또는 '타인을 대신한 삶' 등으로 정의한다.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주체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연대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주체성의 개념 자체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린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바울은 자아의 정의를 타인의 존재에 맡겨버리는 급진적인 타자성의 사람이라고나 할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소명을 주셨다. 그 소명은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르는 일이었다. 바울은 그 소명에 순종한다. 그런데 그 복음에의 소명이 바울의 존재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의해 정의한다. 그래서 그의 주체성은 이렇게 표현된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사실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볼 때 바울은 전혀 주체성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자신은 없고 유대인과 이방인과 율법자와 비율법자와 약한 자만 있기 때문이다. 주관은 없고 복음만 있어 복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자신이 정의되니 말이다(23절). 자유인은 주체성이 있고 그 주체성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자유가 없어 타인에게 종속되어있는 사람이 종(둘로스=노예)이다. 그래서 종은 주체가 없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스의 윤리」에서 '노예는 생명이 있는 연장이고 연장은 생명이 없는 노예'라고 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생명 있는 도구로 내어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3) 그는 모든 사람의 연장이며 복음의 수단이다. 그렇게 바울은 소명을 앞세워 자신을 연장과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리에서 온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

   빚꾸러기가 되어

   소명 중심의 타자지향성은 바울이 자신을 '빚꾸러기'로 정의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빚을 진 '빚꾸러기'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자신의 채권자를 만나기만 하면 그의 머리 속에는 그에게 진 빚이 떠오른다. 빚을 갚기 전에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의 부담을 지울 수 없다. 채무자는 괴롭고 부담스럽고 자유롭지 못하다. 빚을 갚을 때까지는… 바울은 모든 이들을 채권자로 보았고 자신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로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채권단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산다. 물론 이 빚은 복음의 빚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맡긴 소명의 부담이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이것은 그가 로마 교인들에게 주었던 사랑 계명의 권고에서도 적용된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롬 13:8, 표준새번역). 종종 이 구절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오인되어 왔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빚을 금지시키려는 것에 있지 않고 빚에 대한 부정적 통념을 들면서 '사랑의 빚'을 진 사람으로 살라고 권면하는 데 있다. 다시 풀어서 쓰자면 이렇게 된다. "돈을 꾸어 빚꾸러기가 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사랑의 빚꾸러기가 되십시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온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니까요." 무슨 뜻인가?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으로 살라는 말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자기 부정의 타인 사랑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 소명이 빚이다. 누구를 대하던지 그에게 진 사랑의 빚의 부담을 느끼며 산다. 이것이 바울의 채무자 정신이다.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복음의 빚꾸러기요 사랑의 채무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목회자 영성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자 한다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채무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의 종이며 양들을 돌보는 목회자라 하지만 항상 나의 권익을 챙기는 일에 마음이 분주한 채권자로 살고 있는가? 그러한 권익이 충족되지 않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불만족스러운 채권자에 머문다면 우리는 불행한 목회자이다. 사실 복음의 빚과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의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방영되었던 「여명의 눈동자」에서 학병으로 징용되어 싸이판에서 근무하던 장하림이 그곳에 정신대 여인으로 끌려온 여옥에게 한 말은 채무자 정신으로 소명의 삶을 사는 목회자들에게 꽤나 적절하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살맛이 납니다."

4. 십자가와 성령

   그런데 채권자로 사는 일이, 그래서 일생 엄청난 빚을 갚아야 하는 사역의 삶을 어떻게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영원히 부담만 느끼다가 그냥 그대로 마감하는 것은 아닐까? 소명이 자신을 정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담에서 머물고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다면 아쉬움만 크게 남을 것이다. 잠시만 상상을 해 보아도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이 얼마나 막막한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그가 전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니 그를 믿으라'는 것이었다(고전 2:2; 15:3b-4; 갈 3:1; 살전 1:9-10). 그레코-로마 세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christos=메시아=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유대적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마 바울은 이 단어 하나를 설명하는 일만 갖고도 땀을 뻘뻘 흘려야 했을 것이다.

상상해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기름 뒤집어쓴 한 사내가 흉악범이나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달려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자는 로마제국의 저 동쪽 끝에 있는 한 고집 센 민족의 말썽꾸러기로 낙인이 찍힌 사상적으로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인물인 것 같은데, 자기 민족에게서조차도 배척을 받았다 한다. 알쏭달쏭한 이 인물의 십자가 죽음이 헬라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바울의 선포는 스캔들을 넘어서 아예 천치들 사이에서나 말하고 듣고 믿고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거리였다. "미련한 것"이라고(고전 1:23) 점잖게 번역된 헬라어 '모리아'(moria)에서 오늘날 상대방을 비하하고 모욕을 줄 때 욕으로 사용하는 영어 단어 '모론'(moron, 天痴)이 나왔다. 바울의 복음이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서 불러 일으켰던 스캔들적인 거부 반응은 현대에 살면서 기독교 복음의 논리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상식을 불허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4)

   뜨거운 남자 바울

   그러니 그레코-로마 세계의 도시인들이 장막 깁는 유대인 노동자가 복음이라고 강변하는 이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번역된 성서가 널리 보급되어 성경을 놓고 설득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아직 신약성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이다.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성경은 있어도 저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을 터이지만, 설사 바울이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많은 두루마리를 옮기려면 든든한 짐마차가 하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이상한 메시지를 복음이라 하여 저들에게 소개하여 믿게 할 수 있었을까? 바울은 이것을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한다. 그렇다. 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믿어 수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격적인 임재의 역사가 필요했다.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가 없이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으며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영적 각성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울의 몇 군데 증언을 들어보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5-6).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7-18).

   그렇다. 이러한 바울의 언급들을 읽을 때 거의 불가능해 보이던 그의 사역의 성공적 결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성령은 소명의 필수적 조건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바울은 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마는 차가운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운 목회자였고 현장에서 자신을 불사르는 실천가였다. 그를 사로잡고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주도했던 성령도 마음에 잔잔한 감동만 불러일으키는 정적(靜的, static)인 느낌이 아니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시끄럽게 흔들어놓는 동적(動的, dynamic)인 능력(dynamis)이었다. 사도행전의 바울과 바울서신의 바울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 중의 하나가 전자에서는 바울이 능력의 기적 행사자로 묘사되는데 후자에서는 그가 편지를 쓰는 사고(思考)형 목회자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 위의 바울의 언급들을 보건대 바울의 사역 현장은 능력과 기사와 감각적 운동이 충만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의 역사라고 정의한다. 사역은 성령이 하신다. 목회는 성령이 하시며 그래서 바울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목회자는 성령의 목회자가 되어야만 한다. 목회자 바울의 영성(spirituality)은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막연한 범신론적 신인합일(神人合一)이 아니라 종말론적 능력의 구체적 파워인 '성령'에 사로잡힌 영력(the power of the Spirit)이었다.

   약한 것 자랑하기

   어떻게 하면 사역에 꼭 필요한 성령이 역사하는가? 물론 기도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눅 11:13; 행 1:4-5, 14). 필요할 경우 혹자들과 같이 40일 금식을 하던지 아니면 특별한 기간을 정해놓고 작정기도라도 해야할 것이다. 바울서신의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이미 기정 사실로서 전제에 깔고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 기술적인 차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별도의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학계에서 바울의 직접 저술을 의심하는 에베소서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명령이 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이미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끄지 말라"(살전 5:19)는 권고가 있을 뿐이다.5) 그 외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바울서신이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자세를 가지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비교적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방법이나 기술(技術)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 또는 태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어떤 자세? 그것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원리, 즉 죽음과 부활의 원리로서 설명된다. 바울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끌어오는 길을 묘한 역설적 표현으로 고백한다. 이른바, "나는 오히려 약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원리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이 말을 했다. 물론 고린도 공동체는 바울이 개척을 했다(고전 1:17; 2:1-5; 행 18:1-11). 이 공동체에서 모든 기괴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 것은 다양한 이슈가 제기되고 있는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고린도후서 10-13장이 쓰여질 무렵에는 바울을 비난하여 그의 사도적 권위를 깍아내리려는 자칭 수퍼-사도들이 극성을 부릴 때였다(고후 11:5; 12:11). 이들은 바울이 보기에 분명히 다른 영을 가지고 다른 예수를 가르쳐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이단자들이었다. 그러나 미혹을 받은 적지 않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들을 추종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바울의 언변을 문제삼아 그가 편지는 당당하게 잘 쓰는지 몰라도 말에 형편없이 졸하다고 폄하했다(10:1; 11:6). 그들은 이른바 정통 유대 출신을 자랑하면서 이방 도시 다소에서 온 바울은 참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니라고 비판을 했다(고후 11:22). 그러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해 내내 고생만 하고 매 맞고 파선하고 불운만 겹친다고 정죄를 했던 것 같다(고후 11:23-29). 저들은 바울을 형편없이 초라하게 만들면서 자신들에 대한 자랑을 꽤나 심하게 해댔다(고후 10:12).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참 일군이며 의의 사역자요 진정한 사도라고 자만했다(고후 11:13-15).

   자화자찬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바울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바울도 같이 자랑 경쟁에 뛰어들기로 작정한다. 해 볼 테면 해 보자. 바울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분 내가 좀 어리석은 말을 하더라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11:1)… 나도 좀 자랑하게 여러분이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하려거든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받아주십시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주님의 지시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사람과 같이, 자기 자랑거리를 이렇게 장담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육신의 일을 가지고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11:16-18, 표준새번역). 그리고 자신의 신분상의 정통성을 과시하고(11:22), 사역의 수고를 떠벌이는가 하더니(11:23-29) 급기야는 14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입다물어 지켜오던 천상 방문의 경험까지 누설을 해 버렸다(12:1-4).

   아마 계속 이렇게 나갔으면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그러한 인간적 자랑은 모두 쓰레기,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 바 있었다. 이제 교회 내에서도 그와 같은 패권주의와 성공주의를 과시하는 무리들이 설칠 때 바울은 일면 같이 자화자찬의 포퓰리즘(populism)에 뛰어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이런 것들은 모두 공해요 오염일 뿐이다. 바울은 결국 자신에게 있는 약점을 자랑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12:5b).

   그래서 바울은 의도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실패한 기도를 자랑한다. 천상 방문의 큰 계시를 체험한 후에 몸에 생긴 가시가 너무 괴롭고 사역에 장애가 되기에 떠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겟세마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 번에 걸쳐서 기도했다(고후 12:7-8). 그리고 그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이 승(勝)하여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 바울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절이 요지부동(搖之不動)으로 지배적이었다. 세 번의 거절 후 하나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a). 너는 은혜를 입을만큼 입었으니 더 이상 이 일로 나를 찾지 말라. 지금 이 상태가 네게는 최선이다. 일하기 위해 기능하는 것은 너의 건강한 몸이 아니라 너를 사용하는 나의 능력이다. 내 능력이 능력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대로가 좋다. 이상 끝.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 다른 것은 다 배설물이다(빌 3:8).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그럴 때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제대로 자신에게 머물기 때문이다. 고린도에 처음 갔을 때도 그랬다.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을 때"(고전 2:3),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있었다(고전 2:4). 이것은 신비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역설이었다. 이것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한다. 겟세마네에서 세 번의 기도가 거절된 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바울의 십자가는 그의 '약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분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영광이 있었다. 그처럼 바울도 자신의 '약함'을 자랑으로 삼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온전해진 능력으로 바울을 다시 살리셔서 문제의 해결에 도달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달려 돌아가셔야 하나님의 능력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부활의 승리가 있었듯이 바울이 죽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 바울이 약해야 성령께서 능력의 역사를 베푸신다. 이것이 바울이 발견한 성령의 역사와 사역의 신비였다. 사명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2). 내가 죽으면 성령께서 내 사역의 대상들 안에 생명을 불어 일으킨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 가장 중요한 사역은 축귀나 기적이나 대중 모으기가 아니었다. 그분의 진정한 소명은 고난과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의 사역에서 부활의 영광을 거둔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다(롬 8:11). 바울도 이 원리를 알았다. 진정한 자기의 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비결이다. 바울의 약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면, 바울보다 더 약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된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면 성령께서는 하실 일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이런 고백을 하면서 어려운 목회의 길을 의연하게 걷는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 처음으로



1) 한글개역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문은 "텐 [디카이오쉬넨] 디아 피스테오스 크리스투"로서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는 의"이다. 로마서 4:19-31과 갈라디아서 2:15-21에서도 집중적으로 나오는 이 절구는 목적격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 소유격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즉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는 '예수를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피스티스'로 읽는 것이 문법적으로나 구문상으로나 더 자연스럽다. 물론 후자의 경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보여주신 그분의 피스티스(신실하심, 충성)'를 통해서이다.

2) 필자의 글 "나의 십자가, 스캔들 짊어지기," 복음과 상황(2000, 8월호): 92-93에서 인용.

3) 그러나 이것은 의존적 예속이 아니다. 섬김과 종 됨으로 승화되어야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참된 가치를 발휘한다. 자유는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탈피의 자유(freedom from∼)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너를 위한 자유'(freedom for∼)로 발전할 때 참 자유가 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갈라디아서 5장의 변증법적 자유론이다. 바울은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천명한다. 그러나 13절에 가서는 자유(eleutheria)의 정반대 개념인 노예(doulos - 정의상 자유가 없는 사람)가 될 것을 권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졸저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조태연, 차정식과 共著)의 24장, "사랑과 자유의 변주곡"을 읽어보라.

4) 유승원,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231.

5) 한글개역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번역을 했지만, 실제로 여기서 사용된 헬라 동사는 sybennymi로서 '불을 끄다'라는 뜻의 단어이다. 바울이 언급하는 성령의 역사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것을 타오르는 불에 비유되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