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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그리스도인과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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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 교수이신 조병수 목사님의 글임을 밝힙니다.

          
쾌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녔던 삶의 한 특징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전에는 행락(쾌락)에 종노릇한 자였다"(딛 3:3). 쾌락은 무지, 불신, 사기, 정욕, 악독, 투기, 가증, 상호 증오와 같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옛 삶을 이루고 있는 무서운 요소이다(참조. 벧후 2:13). 쾌락은 주인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쾌락에 종노릇을 하였다. 이러한 옛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셨다(딛 3:4). 쾌락에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하다(딛 3:5).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와 같이 바울이 쾌락에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삶을 운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칫하면 다시 쾌락을 추구하는 삶으로 돌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이전의 수치를 사모하고, 현재의 영광을 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쾌락은 여전히 무서운 유혹거리이다.

야고보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심지어 쾌락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쾌락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기 때문이다(약 4:3). 이것은 잘못된 기도에 대한 대표적인 예이다. 쾌락을 위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쾌락은 다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약 4:1). 그래서 쾌락은 "싸우는 쾌락"이라고 불리운다(약 4:1). 사람들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싸움을 한다. 오직 쾌락의 자리인 육신의 "지체", 몸의 각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사람과도 싸우고 하나님과도 싸운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쾌락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적이며, 최종의 적이다.

예수께서도 쾌락은 최대의 적이며, 최종의 적인 것을 알려주셨다. 이것은 눅 8장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는데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에 세 가지 적이 있다. 첫째는 길가의 적이고, 둘째는 바위의 적이고, 세째는 가시떨기의 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마지막 적인 가시떨기는 또 다시 세 가지 원수를 가리킨다. "염려와 재리와 쾌락"이다(눅 8:14).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순서에 주의해야 한다. 모든 인생은 더 나은 경제를 갖기 위해 염려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단계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재물을 모으게 되면 반드시 쾌락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쾌락이란 것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시와 같은 존재이며, 마지막 단계의 문제이다. 쾌락은 최종적인 적이다. 쾌락은 말씀을 질식시키고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최종적인 적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말세가 되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딤후 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쾌락을 억제하는데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쾌락주의라고 생각된다. 세상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쾌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할 때 깊은 비판력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쾌락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는 예수, 베드로, 바울, 야고보와 같은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인물들이 쾌락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쾌락을 멀리함으로써 이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것을 분명하게 보일 수가 있다(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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