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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도이상돈의 신앙이야기[제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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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 이야기 시작합니다.

          
제가 순순히 K선배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조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절치부심(切齒腐心) 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K선배가 이민가기 전에 어떻게든 선배가 가지고 있는 조직에 대한 노-하우(know-how)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생각 해봐도 선배의 지혜는 뭔가 많이 달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선배가 제게 어떤 사람을 소개하면서 소개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능력 기타 잡다한 내용들을 귀 뜸해 주곤 했었는데 그것이 대부분 옳았다는데 에서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K선배가 소개해 주는 사람들이 K선배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더 오래 알고 지냈던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우리의 견해가 서로 달랐을 경우 어김없이 K선배의 생각이 옳았음이 늘 증명이 됐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배우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K선배를 따라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출석 하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으므로 신앙에는 별 관심 없고 예배 끝나기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다가 끝나고 나면 밤을 세우면서 토론을 벌이고는 했었습니다.

K선배는 저를 자신이 늘 노래 부르는 것처럼“예수쟁이” 혹은 “예수똘마니”로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동상이몽(同床異夢)이긴 했지만, 함께하고자 하는 뜻은 같았으므로 많은 시간들을 함께할 수 있었다고 생각 됩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소중했던 시간들이고 평생의 은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K선배가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진정한 “예수쟁이”를 만들지는 못하고 이민 갔습니다. 아마도 그렇다는 것을 K선배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군요. 하여튼 그렇게 하여 교회는 출석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예수 똘마니?”(어라! 이게 아닌데 하하하...나도 옮았나 보네 이거 하하하...)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에 갔을 때(부흥회니 간증이니 하는 데는 아내가 하도 졸라서 한두 번 간적은 있었음) 많이들 좋아하더군요. 특히 목사님께서 좋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제 아내야 더 말해 뭐합니까. 눈물이 다 글썽하여 “오 ! 주여 감사합니다.”를 연호하는 표정이더군요.

오랜만에 그렇게 좋아하는 아내를 보니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더욱 제 믿음이 확고부동(確固不動)해 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무지 목사님의 설교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훨씬 많았으니까요.

그럴 때면 으레 히 예배 후에 K선배와 토론을 벌이고는 했는데 목사님의 설교내용의 부당성에 대하여 설명하면 대부분 수궁했던 걸로 기억 됩니다. 그러면서 K선배도 역시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는 조금 안타까워하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으나 그렇다고 목사님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딱 한번 언젠가 예배 후에 점심식사 하면서(그때는 예배가 끝나면 점심식사를 했슴) 목사님께 목사님 그러니까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러이러 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제 견해가 좀 다른데 그것은 혹시 이런 것 아닐까요. 하는데 딱 내가 하고 싶던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목사님께서 웃으시면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셨지만, 그 후로 K선배에 대하여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또다시 선배와의 토론이 벌어졌는데, 주제는 당연히 신앙에 관한 것이었겠지요? 그때 놀라운 사실을 새삼 발견 했는데요. 선배의 “신앙세계”가 나와 많이 닮아 있음을 알았습니다.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나는 “부처님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선배는 “예수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차이라면 차이 일까요.. 그럴 때 마다 토론이 끝나갈 때면 K선배가 내게 해주던 말이 있는데 말입니다,. “절대로 사람을 보고 교회에 다니지 말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제가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 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제 어릴 적 추억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반부에서 조금 말씀을 드렸었는데, 제 고모님이 스님이셨고, 그래서 어렸을 때에 절에서 생활한 적도 많았었다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여하튼 그런 시기였는데 어느 해 겨울방학(초등학교 3~5년 중 어느 겨울쯤으로 추정됨) 엔 혼자서 겨울방학 내내 절에서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사색에 잠길 때면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도비산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서산으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서해바다가 석양에 붉게 물들어 온통 불바다가 된 것 같던 그 장엄했던 광경이 떠오르곤 합니다만, 그랬던 그 작은 암자에는 당시에 고모님과 상좌승(주지스님과 자식 같은 관계) 그리고 저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양주(스님은 아니지만 주로 절에서 생활하면서 살림하시던 분) 도 한분 계셨는데 그때 아마도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러 날 절을 떠나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린 저와 셋 밖에 없었던 관계로 긴긴 겨울날 뭘 하겠습니까? 심심하니까 두 분이서 번갈아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해 주셨겠지요.. 하하하....

더구나 제가 어른들에게는 상당히 고분고분한 편이라서 엄청 귀여워 해 주셨습니다. 그런 덕분에 비록 철부지 였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경청 하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많은 질문들을 한 것 같습니다. 고모님께서는 제가 뭘 질문 할 때 마다 굉장히 좋아 라 하시면서 더욱 친절하게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시곤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만, 가끔은 곤란한 질문인지 난감해 하시던 모습도 어렵 풋 이 생각납니다.

막연히 이렇게 말하니 궁금하실 것 같아 기억나는 것 한 가지만, 소개해 볼까 합니다. 어느날인가 부엌에 쥐가 돌아 다녔는데요. 상좌승이 그걸 부지깽이로 때려죽이는 것을 목격 했습니다. “고모” “왜 불러” “살생하면 안된다 고 하셨는데 왜 쥐를 죽여요,” “......! 글쎄 말이다.”

그런 고모님은 그러나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며 철모를 땐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때에 새벽마다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와 목탁소리 뒤이어 아침예불 올리는 독경소리를 들으면서 새벽 잠 에서 깨어나곤 했었고, 저녁에는 또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쪽에는 겨울에 유난히 눈이 많이 옵니다. 그렇다 보니 항상 온 산이 눈으로 뒤 덮여 있을 때가 많이 있었고, 더욱 고즈넉해진 산사에는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아침저녁 들려오는 종소리 목탁소리 독경(예불올릴때 읊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어쩌고 하는 것) 풍경소리. 한밤에는 나뭇가지에 있던 커다란 눈덩이가 후두둑 하면서 떨어지는 소리... 예술입니다..

어느 날 제가 또 질문 했습니다. “고모” “응 왜 또.. 뭐가 궁금하신가. 도련님” “이렇게 눈도 많이 오고 추운데 왜 그렇게 힘들게 목탁치고 독경하고 그래요? 그리고 방안 대웅전에 있는 부처님 앞에서만 하셔도 될텐데. 밖에 있는 부처님 앞에서 그렇게 오래 하셔요. 더군다나 아무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그것이 궁금했구나. 아무도 없다니 여기 지금 너도 있고 특히 부처님이 계시지 않느냐?  더욱 중요한 것은 부처님을 믿고 오늘도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계실 처사님들 보살님들에게 그리고 불쌍한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한 몸 편하자고 어떻게 부처님께 예불을 안 드릴 수 있겠느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어디에도 계시고 그렇게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니란다...등등. ” 아무튼 황당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그날은 하루 왼 종일 더 많은 불경공부를 해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하여튼 고모님의 말씀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세월이 흐를수록 참으로 존경스럽더군요.

그런 고모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으로 기억 됩니다. 그런 적막한 산사에도 시끌벅적 해 질때가 있는데 각종 행사가 있을 때 입니다. 그런 행사는 의외로 많이 있는데, 겨울 같은 때에는 대개 두분 이서 행사를 치루시고 는 하는 것 같더군요. 가끔은 그 험난한 눈 쌓인 산길을 헤치고 찾아와서 함께 행사를 치루 곤 하던 불심 깊던 불자들이 있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럴때면, 고모님은 그런 불자들을 무척 반기시면 서도 “이 험한 산길에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느냐..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날씨 좋을 때나 오고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집에서 그냥 부처님께 공양 올리게. 부처님은 어디든 다 계신 것이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씀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적막한 산사에 모처럼 손님이 오셔서 좋았었는데, 고모님이 다음엔 오지 말라고 하니 어린마음에 그런 고모님이 무척 야속했었나 보더라고요. 하하하... 또한 그렇게 불자들이 다녀가야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가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오면서 식량 등을 짊어지고 오셨기 때문에.. 어떨 때는 그냥 빈손으로 오는 분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친절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걸 제가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어느 날인가 보니 상좌승이 이런 말을 한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님 공양 올려야 할 텐데 식량이 바닥나서 며칠 못갈 것 같은데요.” 어린 마음에도 무지하게 걱정되고 한편으론 은근히 죄지은 느낌도 들면서 이거 괜히 내가 고모네 와서 고모 힘들게 하고 있구나 하며 속으로 후회도 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다보니 그때의 충격적이었던 장면이 또 하나 떠오르는군요.. 양식이 떨어질때 쯤 때맞추어 찾아오셨던 손님들이 가시고 나서의 일입니다. 또다시 셋이 남게 되었는데 상좌승이 고모님께 그러 셨 습니다. “스님 왜 그들에게 어째서 이제야 오느냐 그리고 행사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데, 부처님께 그렇게 소홀하면 되겠는가.. 앞으로는 좀더 성실하게 부처님 섬기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늘 그렇게 태평이십니까? 오늘 다행히 그분들이 오셨으니 망정이지 양식이 떨어질 뻔 했다니까요.“  이렇게 상좌승이 고모에게 말했다가 그렇게 무서운 고모님을 그때 처음 뵙습니다. “네 이 요상한 잡귀 년아. 썩 물러가라.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치더냐?”

로 시작한 고모님의 훈계는 오래 오래 계속 됐는데 그날 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나중에 고모님 노여움이 풀린 후에 제가 여쭤봤습니다. “저 제 생각엔 상좌스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놓곤 혼날 까봐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의외로 부드럽게 웃으시며 그러셨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내가 부처님께 귀의해서 한번도 양식이 떨어져서 굶어 본적이 없단다. 그리고 굶게 되면 또 어떠냐.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 따라야지. 그리고 이 험한 산길에 양식을 짊어지고 오는 분들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살기 위함도 있지만, *대개는 현실의 삶에 너무도 지치고 힘들어서 오실 때가 많단다. *

그러시면서 눈물이 글썽 하시는 것을 뵌 것 같은데, 옛 생각하다보니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나려 하네요. 그랬던 고모님께서 는 열반하신지가 벌써 30년 가까이 되는군요. ..

오늘은 어떻게 옛날 생각하다가 옆으로 많이 빗나갔군요. 여기까지 이야기 하겠습니다. 평안 하십시요..“늘 그렇듯이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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